아무런 선입견 없이 대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우리 망막에 비친 이미지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곰브리치(Ernst Hans Josef Gombrich, 1909~2001)가 『예술과 환영Art and Illusion』(1960)을 통해 던진 문제제기는 '왜 자연의 재현이 오늘날에 와서는 진부한 것으로 간

대구대학교 기초교육대학 창조융합학부 이소영 교수

주되고 있는가'에 있다. 이 책이 저술된 당시는 양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각종 예술운동의 진원지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고, 20세기 초엽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던 추상계열의 회화들이 대거 선보임으로써 바야흐로 추상표현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르네상스 이후로 유럽 회화의 역사를 관통해 왔던 주제인 '재현'의 문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는 지점에서 곰브리치는 다시금 재현에 관한 방대하고 심도 있는 재검토를 실행한다.

 『예술과 환영』에 앞서 저술된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에서 그는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모든 관례적 기법을 버리고 '그가 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회화적 재현의 심리학적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예술과 환영』은 지각의 심리학(Psychology of percept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을 다루고 있으며, 『서양미술사』에서 표명한 명제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철학과 미학, 심리학 그리고 문화사 전반을 가로지르며 연구한 역저이기도 하다.

 ‘회화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 눈앞에 데려다주고 이미 몇 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일지라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회화의 신성한 힘이라고 알베르티(Alberti)는 전한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한 여인이 떠나게 될 연인에게 촛불을 비추고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서 그린다. 그리고 도공인 여인의 아버지가 색을 입힌다. 그렇게 하여 여인은 그녀의 사랑하는 연인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다. 사랑하는 연인은 오늘은 눈앞에 있지만, 즉 present 하지만 내일은 떠난다. 즉 re-present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재현이다. 이처럼 ‘재현’이란 ‘실물을 묘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 ‘무엇인가를 대체하는’ 기능에서 발생한다. 이 ‘대체’하는 기능은 심리적인 요구, 생물학적인 내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회화는 종종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군주나 경배하는 신들의 형상을 재현하여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 활용하기도 한다. 곰브리치는 재현을 대상의 지각에서 출발해서, 이미지를 제작하고, 거기에 상징적 기능이 입혀지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본다.

 알랭(Alain)의 인체 데생 교실은 모델을 둘러싸고 여러 각도에서 그림을 그리는 소년들로 가득 차 있다. 과연 소년들은 어떤 그림들을 내놓았을까? 아마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모델을 관찰했으니 각기 다른 모습을 그렸으리라고 추정할 테다. 그러나 놀랍게도 모두 똑같은 그림을 그려내었다. 소년들은 본대로 그리지 않고 배워서 알고 있는 형태를 그린 것이다. 실제로 이집트인들의 인물묘사는 정면성의 원리에 의하여, 전통적 양식(style)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곰브리치는 이 점에 착안하여 시지각(視知覺)과 심리학의 관계를 ‘도식(schema)’의 형성과정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사물을 지각할 때 오로지 눈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知)의 도식’을 적용한다. 시지각 자체가 개념적 사유라는 색안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주변의 사물을 재현할 때, 눈으로 보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 보다는 관습이 전해주는 도식을 통해 먼저 만들고(making), 나중에 자신이 그린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을 서로 맞추어(matching) 보면서 개선한다. 이때 현실을 재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틀이란 과거로부터 전수받은 전통을 학습한 결과이며, 그 기억의 바탕위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재현을 넘어서는 기술에 이르게 된다. 곰브리치는 양식의 창안과 전개에 도식(가설), 관찰, 시험 같은 개념들을 반복적으로 적용한다.

 그런데 회화적 재현에 있어서 예술가는 불가피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즉 운동하는 3차원의 세계를 고정된 2차원의 평면에 도입해야 한다는 점, 한정된 색상으로 빛을 표현하거나, 형태·명암 등의 변형효과를 줄 때의 괴리감, 또 예술가 자신의 내적 요인의 작용처럼 매체의 성격과 심적 태도에 의해 제약을 받게 된다. 그래서 화가는 자신이 '본 것'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된다. 곰브리치는 많은 경우 화가들이 시대적 분위기와 자신의 관심사로부터 부과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시각적 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관념이나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을 그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찰이라는 과정은 망막에 실재가 투영되어 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곰브리치는 이 투사행위를 ‘환영(幻影, Illusion)’ 혹은 ‘환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재현에 있어서 이 환영의 존재는 필수적이라고 본다. 가령 유리창에 아름드리나무가 투시되어 있다 하더라도 실제 그 나무는 그 규모와 위치가 당연히 유리창 위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시 말해 ‘본다’라는 시각 활동을 통해 우리는 저 바깥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림은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우리의 경험을 단일 프레임 안에 가두어 구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은 외부 세계상을 창틀 즉 프레임(Frame) 안에 넣어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는 원근법을 이용하여 완벽한 3차원적 환영을 만들었다. 그리고 3차원적 환영을 만든 비밀의 열쇠는 바로 소실점에 있다. 소실점이란 대상이 눈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때 한 순간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지점이다. 원근법에서 소실점은 화면을 구성하는 특권적 지점이면서 동시에 관객의 눈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특권적 시점이기도 하다. 그림을 보는 관객의 눈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화면의 소실점에 맞추어진다. 다시 말해 주체가 중심이 되어 대상세계를 재현하는 시선의 패러다임이 전제되어있다는 얘기다.

 반면 프랑스 작가 펠리체 바리니(Felice Varini)는 눈의 착시현상을 이용하여 환영의 공간을 만든다. 얼핏 보면 파란색 나무나 철재를 방안에 세워 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얀 벽과 천정, 나무색 바닥, 투명한 유리창 위에 파란색 페인트로 칠해 놓은 것이다.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반드시 공간의 어느 특정한 지점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그 특정한 지점을 벗어날 경우 파란색 선이 더 이상 3차원적 이미지의 환영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시각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환영을 포착해야 한다는 점에서 안티 원근법적이다.

 라캉(Jacques Lacan)에 따르면 단순히 보이는 것(시선) 속에는 항상 미리 앞서서 ‘보도록 주어진 것’이 존재한다. 카메라처럼 기계적으로 사물의 외부를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이끌림에 의해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다는 것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욕망하는 시선(응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보이는 것’ 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현상학적 지향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보이는 것’이 우리의 시선이나 의식에 떠오르는 표층의 세계라면, ‘보이지 않는 것’이란 무의식처럼 우리의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의 표층을 통제하는 지평을 뜻한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은 결코 중립적으로 세상을 보거나 사유할 수 있는 자립적 주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을 명백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자의식을 가진 주체도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원근법 화가들은 모든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투명하게 지배하듯이 자신 또한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현대의 사유는 완전히 투명하게 사유될 수 없는 시간적 두께를 지닌 속성으로 주체를 파악하고 있다.

 곰브리치는 개선과 발전 없이 예술의 진보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화가는 모호한 가시 세계 자체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공하는 여러 가능한 해석들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다. 과학적 진실이 우리의 믿음과는 별개로 여겨지지만 재현은 우리의 믿음과 관련되며, 과학이 환영을 제외하는 반면 모든 회화적 재현에서는 환영이 출발점이 된다. 세계가 결코 하나의 그림처럼 보일 수 없지만, 하나의 그림은 세계처럼 보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