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나무 같이 올곧고 원리원칙을 지키는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 분). 20년 동안 8천 건의 민원신고를 넣어 구청 공무원 사이에서 ‘도깨비 할머니’ 라고 불리는 옥분(나문희 분) 할머니. 이 둘의 조화는 얼마든지 코믹적인 요소로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캐릭터다. ‘하우 알 유?’, ‘아이 파인 땡큐 앤 유?’ 라는 인사말을 하지 못하는 옥분 할머니는 굉장히 영어 공부에 열정적이다. 영어학원도 끊고 미국방송도 보면서 어느 젊은이 못지않게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한다. 하지만 학원은 그런 할머니를 받아주지 않고 오히려 학원비를 돌려주며 노인학교에서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할머니는 속이 상한다. 그리고 우연히 민재가 그 학원에서 원어민과 유창하게 영어 대화를 하는 것을 목격하고 영어를 가르쳐달라며 따라다닌다. 결국 나중에 민재는 할머니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게 되고 “왜 영어를 배우고 싶으세요?” 라고 묻는다. 옥분 할머니는 “미국에 사는 남동생이 있는데 얘기를 하고 싶어도 영어를 못하니 뭔 얘기를 할 수 있어야지” 라고 답한다.

영화를 본 독자는 알겠지만 옥분 할머니가 영어를 ‘정말’ 배우고 싶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할머니의 이야기와 이 영화의 배경을 보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먼저 이 영화의 배경은 2007년도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 공개 청문회에서 증언을 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故 김군자, 얀 러프 오헤른 할머니의 모습을 재현한다. 여기서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은 일본계 미국인 하원의원 마이클 혼다 의원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게 사죄하고 진상규명을 하며 역사적인 책무를 지라는 UN의 권고를 무시한 일본에게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게 사죄하라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이다.

다시 영화의 얘기로 돌아가 보면 후반부쯤에서 옥분 할머니가 민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이야기 내용 중 관객의 화를 불러일으킨 내용이 있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했던 옥분 할머니는 통역사에 의지하여 자신들이 피해를 받았던 이야기와 일본의 만행에 대해 목소리를 냈지만 통역사가 그 내용을 왜곡하여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이 계기로 옥분 할머니는 세상 속에 숨었고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옥분 할머니와 같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였던 정심(손숙 분)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더 이상 청문회에서 증언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자 큰 결심을 하고 언론을 통해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것을 밝힌다. 옥분 할머니에게 있어서 영어 공부는 단순히 미국에서 살고 있는 남동생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픈 역사의 피해자로서 일본의 역사적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더 이상 전쟁의 참혹함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평화를 말하고 싶었던 간절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옥분 할머니의 모습도 인상 깊지만 이런 할머니의 사연을 알게 된 주변인이 할머니를 위로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실제로 김현석 감독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안타까운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꿋꿋하게 삶을 살아내는 존재로 그려내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라고 말했다. 이런 시각은 진주댁(염혜란 분)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언론을 통해 옥분 할머니가 처음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가족에게서도 외면 받은 할머니를 안아주며 “우리 형님 얼마나 힘들었을꼬” 라고 하며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린다. 옥분 할머니의 아픔을 진정으로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진주댁을 보면서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게 진정으로 해왔던 혹은 하고 싶었던 말과 행동이 전해지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뭉클해진다.

앞서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 영화 역시 ‘예술’ 의 한 형태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존재’ 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감독의 깊은 고민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문희 배우의 연기는 피해자 할머니의 심정과 자세를 담담하면서도 절실하게 표현하여 ‘역시’ 라는 말을 나오게 한다. 요 근래 한국영화는 항상 싸우고 서로를 물어뜯는 자극적인 영화만 상영되어 아쉬웠는데 이런 잔잔한 울림을 주는 영화를 보게 되어 영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