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하나라는 구호 아래 지구촌 시대가 열렸고 21세기 도처의 대학들은 공생을 위한 더 나은 방안들을 마련하기 위해 세계시민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국가, 민족, 인종 사이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아직도 ‘민족’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다. 2002년 번역되어 소개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1991)는 재고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읽혔고, 2018년 현재 다시 상상된 공동체(서지원 역)로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 국어교육과 전용숙 교수

1. 왜 우리는 여전히 ‘민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베네딕트 앤더슨이 답한다. 그가 『상상의 공동체』를 집필하게 된 계기는“1978～79년 사이에 인도차이나에서 있었던 무력갈등” 때문이었다. 앤더슨은 사상이 같은 국가 간의 싸움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사상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들의 전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된다. 문제는 ‘민족’이다.
익히 ‘민족’이라 하면 오랜 집단생활을 통해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역사적 공동체를 이른다. 즉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생득적인 정체성들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러나 앤더슨은 근대가 도래한 후에 ‘민족’ 개념에 변화가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관점의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근대적 민족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에 만들어진 ‘문화적 산물’이며 ‘정치적 공동체’이다. ‘문화적 산물’이란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족’을 ‘정치적 공동체’와 동일화하다니 이건 좀 충격적이다. 민족이 생득적이라면 정치적 공동체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임의적이며 의도적으로 조직된 집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차별적인 두 용어를 등가화시키는 앤더슨의 의도에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는 ‘민족 상상의 가능성’이 문화 개념 중 근본적인 세 가지를 잃어버린 때와 장소에서 일어났다고 보았다. 이 세 가지는 첫째 정본언어, 둘째 군주(지배자), 셋째 시간의 개념이다. 정본 언어는 종교 공동체의 언어로서 “진리 언어”를 일컫는 것이며, 군주의 정통성 역시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이들을 잃어버린 시대는 곧 근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라틴어로 쓰여졌던 성서가 독일어와 같은 각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성직자와 왕, 귀족만이 향유하던 베일 속에 가려진 진실을 다수가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이 주체성을 가지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다. 종교와 왕조국가는 서로를 보증하는 신성동맹을 맺음으로써 근대 이전의 강력한 신성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지방어(민족어)의 대중화에 따른 라틴어라는 신성한 언어의 격하로 종교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인 회의는 시작된다.
이러한 회의와 의심은 새로운 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때 새로운 구심점으로 가장 보편적인 공감과 대중적인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 ‘민족’이었다. 이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상상의 공동체는 사회구성원과 사회체제에 대하여 전통적인 문화체계와 완전히 이질적인 사유의 패러다임을 공유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동시성’이다. 동시성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혀 모르는 지역의 사람끼리도 동질감을 형성하게 한다. 근대 이전의 동시성은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정말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고 같은 연호를 쓴다든지 혈연으로 얽혀있는 필연 집단인 것이다. 그들이 ‘동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시간 개념은 다르다. 근대의 ‘동시성’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연적으로 근대의 산물에 의해 동질감을 가지게 한다. 이들은 필연적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는데 그 장치로써 시계, 달력, 기차, 인쇄물 등이 일정한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시계와 달력은 서로 멀리 떨어져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며, 기차는 이질적인 삶의 공간을 일일생활권으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한편 새롭게 상상된 민족은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확산된다. 자본가들의 경우에는 상품화된 인쇄물들을 팔기 위해서 라틴어가 아닌 지방어(민족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이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성과를 이뤄낸다. 자본주의의 발달이 민족의식의 전파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 민족 상상의 문화적 장치
앤더슨은 필리핀의 민족주의 작가인 호세 리잘의 『놀리 메 탕헤레』(Noli Me Tangere)를 민족 공동체를 추동하는 장치로써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 낸 대표적 사례로 제시한다. 아울러 당대의 신문도 분석한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들의 배치,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상징하는 신문의 상단에 균일하게 위치한 날짜 등에 주목하고 신문 읽는 행위를 매일 행해지는 대중의례라고 표현한다.(어머니가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우리의 아버지들이 신문을 펼쳐 읽는 모습은 1970~80년대 한국의 어느 가정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던 장면이었음을 알고 있다면 대중의례라는 표현에 완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조간은 아침기도의 대용 역할을 하고 한나절의 간격으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게다가 내가 읽는 것을 전철, 이발소 등에서 이웃들도 읽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독자는 익명의 우리가 무엇인가를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앤더슨은 공동체를 상상하게 하는 적절한 장치로 신문을 제시한다.
이 부분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는 앞서 언급한 근대의 동시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사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는 실제로 멀리 떨어져 살면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형제라고 느끼게 하는 근대의 동시성에 대해 설명해준다.(구글이나 다음 등의 홈페이지를 보라. 인도네시아 지진과 쓰나미 소식부터 태풍 짜미, 노벨화학상 수상자 소식 등 무수한 정보가 혼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구 어디에서든 인도네시아에서 실종된 한국인의 소식을 들을 수 있고 그의 무사귀환을 기원할 수 있다.) 둘째는 상상의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소설과 신문 등의 인쇄물이 얼마나 효과적인 매체로 활용될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활자어(인쇄어)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이질적이고 다양하던 구어 지방어의 통일을 가져왔고, 이를 통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동질성을 느끼게 되었다. 의사소통과 관심의 동질화는 특정 민족으로 상상된 공동체의 싹을 틔웠다. 이는 앤더슨의 지적처럼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문화적 장치들이 공동체의 공통된 상상에 함께 기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명확한 사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3. 양날의 검, 민족주의
앤더슨은 또한 센서스, 지도, 박물관이라는 장치들이 민족 형성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설명한다. 센서스는 인종에 의해 사람을 분류하고 계량화하는 장치이다. 인종, 혈통 등에 관한 질문을 통해 계량화된 사람들은 센서스 상에서 동질성을 지니게 되는데 이처럼 동질성을 지닌 일련의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 민족국가라고 보았다.
이렇게 상상된 민족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가진다. 첫째,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경계짓기가 꼭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이는 곧 종교에서 자유로운 공동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셋째,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이다.”라는 앤더슨의 말처럼 불평등과 수탈을 조장할 때조차 “우리는 같은 민족 같은 형제자매 아이가!”라는 구호 하나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로 상상된 민족은 양날의 검이다. 앤더슨은 민족주의가 제국주의로 확장되면서 인종주의로 변질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떤 인종이 또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며 이 경우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인종주의는 “민족의 이념보다 계급의 이념, 무엇보다도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신성을, 귀족들이 자신들의 ‘명문’ 혹은 ‘백인’ 혈통과 자기들 안에서의 번식을 주장하는 이념에 그 기원을” 둔다. 이러한 인종주의는 민족주의와 개념적 구별이 있을 뿐 실은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가 인종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적인데, 한 민족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외부에 ‘야만’과 ‘열등’을 상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르만 우월주의가 유태인에 대한 학살로 이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민족주의는 식민주의에 대한 옹호의 입장을 취한다. 식민지 지식인들이 자국 민족이 미개하다는 이유로 계몽을 내세우는 경우, 자국의 근대화를 위해 더 미개한 야만을 상정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의 최남선 잡지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최남선은 그의 논설에서 인종 차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에는 단아한 조선인과 벌거벗은 미개인을 한 지면에 게재함으로써 조선의 우월함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는 민족주의가 인종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경우다.

4. ‘민족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글로벌 시대에 민족이라는 경계가 모호해지고, 민족주의가 인종주의적 맹아를 배태하고 있는 것이라면 민족 혹은 민족주의는 폐기되어야 하는가? 제국주의시대 민족주의는 식민주의적 침탈에 대항하여 피식민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저항적 특징을 지니기도 하지만, 반면 배타적, 국수주의적, 침략주의적 인종주의의 특성 또한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양면성을 지닌 민족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할까?
잘 생각해보자. 글로벌 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민족 단위의 수탈이 이루어지고 경제적인 분업 역시 국제적으로 민족 단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거의 매년 유엔은 새로운 회원을 받아들인다. 또한 한때는 완전히 통합되었다고 생각되던 많은 ‘구국가(old nations)’들이 그들의 국경 안에서 하위 민족주의(sub-nationalism)-당연히 이 하위성을 벗어나는 기쁜 날을 꿈꾸는 민족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음을 발견한다.”는 앤더슨의 말처럼 최근에도 카탈루냐 분리 독립 투표가 화두가 되고 있다. 세계 금융위기 타격과 관련한 경제적인 문제가 계기가 되었지만 독립선언을 가능하게 한 근간은 결국 민족이다. 커피재배지의 노동착취 문제는 어떤가?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난민은? 21세기 지구촌 시대에도 억압과 차별, 또한 그에 맞서는 저항마저도 여전히 민족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민족주의를 버린다는 것은 다시 말해 글로벌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억압에 대한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효과적인 무기 하나를 빼앗기는 것이기도 하므로.

이처럼 생각의 전환을 통해 민족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 민족주의가 제대로 된 저항을 추동할 수 있는 사상인지에 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한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민족 단위의 경쟁이 전면화 되는 시대, 세계시민의식을 강조하면서도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인식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가장 뜨겁게 논의되어야 할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필독할 가치가 있다.

<저자소개>
대구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읽고 쓴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소한 것, 상품 가치가 없다고 낙인찍힌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소중한 것으로부터 세상의 변혁이 시작된다고 믿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