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질 리 없는 불빛

 거실의 불빛이 깜빡였다. 전등을 갈지 않은 탓이었다. 아빠는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힐끔 소파 아래를 바라봤다. 과자봉지를 발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학교에 다녀온 뒤 빈 집안에서 마주친 아빠는 거의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파와 한 몸이 된 아빠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딸, 다녀왔어?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한 번도 소리 내어 대답한 적 없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내게 아는 척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과자 봉지들을 주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계속해서 깜빡이는 불빛이 신경 쓰였다. 고개를 들어 살짝 올려다봤다. 꺼져가면서도 어떻게든 켜지려 하고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빠는 실직한 이후로 일자리를 찾지 않고 집에 눌러 앉아버렸다. 엄마의 잔소리에도 꿈쩍 않고 집을 지켰다. 주말이면 일거리를 찾으라고 닦달하는 엄마의 말에 집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저녁 늦게 집으로 되돌아왔다. 어디에 있다 오는 것인지 엄마는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오든, 오지 않든 엄마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 듯 했다. 단순히 아빠와 함께 있기 싫은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과자봉지를 치우는 동안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시선이 느껴졌다. 모르는 척 부엌으로 가 쓰레기통에 과자봉지를 버렸다. 방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조명을 바라봤다.  아빠가 실직하기 바로 며칠 전 갈아준 조명이었다. 불빛이 희미해진 것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작은 손가방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동네 마트 캐셔였던 탓에 장소 이동이 어려운 엄마는 나를 자주 직장으로 불러냈다. 엄마의 방으로 가 익숙하게 작은 손가방을 집어 들었다. 초록색과 보라색 줄무늬의 오래된 가방이었다. 천이 조금 헤져있었다. 거실로 나오자 또 다시 아빠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게 어디 가니? 하고 묻고 있는 듯 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 시선을 무시한 채 집 밖으로 빠져 나왔다.
 엄마가 일하는 마트는 집 근처 상가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파트를 빠져나온 뒤 얼마 걷지 않아 상가에 도착했다. 입구 가까이 다가가며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러 간판들 속에 무용학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응시했다.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어 간판에 불이 켜졌다. 고개를 푹 숙였다.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을 들킨 기분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상가 중앙 계단 가까이 가서야 걸음을 멈췄다. 힐끔 옆을 바라봤다. 머리를 위로 올려 묶은 아이들이 상가에서 나왔다.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그들은 어린 백조 같아 보였다.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멍하니 바라봤다. 순간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방을 뒤로 숨겼다. 입술을 꾹 깨물고 또 다시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마트에 도착하자 어쩐지 안심이 되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계산대 쪽을 살폈다. 엄마는 제일 안 쪽 사무실과 붙어 있는 계산대에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려 할 때 사무실 안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는 얇은 파란색 셔츠와 정장바지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웃으며 엄마 앞에 섰다. 엄마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미소였다. 때문에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다. 훔쳐보는 것만 같아 기둥에 몸을 숨기려던 차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나를 보며 미소 지었고, 엄마는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순간 놀라 급하게 뒷걸음질 쳤다.
“어디가! 손가방 주고 가야지!”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댔다.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거리를 두자 엄마가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얘가, 우리 딸이에요. 상냥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엄마가 생소했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 깔았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미령 씨 닮아서 참 예쁘네. 안녕?”
 살짝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을 맞췄다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분명 별 것 아닌 일에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남자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몸에서 힘을 풀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색하게 웃으며 차마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남자의 코끝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자신감 없는 내 목소리에 엄마는 멋쩍게 웃었다.
 “학교 다녀오느라 힘들어서 그런가 봐요.”
 그래? 그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까? 내 눈을 끈질기게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을 간신히 피하고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남자와 함께 식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집에 가서 공부해야 해요. 그 말에 남자는 아쉽다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 열심히 해라. 나는 엄마의 품에 손가방을 안겨주고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뒤를 돌아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소파에 누워 잠든 아빠의 모습이었다. 힘이 풀렸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 힐끔 본 창밖이 어두웠다. 시간을 확인하려 벽에 걸려있던 시계를 바라봤다. 3시였다. 초침은 움직이지 않았다. 털썩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멍하니 움직이지 않는 시계바늘만 주시했다. 나도 함께 멈춰버린 듯 했다. 방금 전 봤던 무용학원이 문득 생각났다. 발레복을 입은 아이들이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을 떠올렸다. 나도 모르게 입으로 음악을 흥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나는 흥얼거리던 것을 멈췄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발걸음은 내 방 앞에서 멈췄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책상을 등지고 몸을 웅크렸다.
 “밥 먹을래?”
 아빠의 목소리였다. 속이 별로 안 좋아요. 툭 쏘아붙였다. 내 말투에 나 역시 놀랐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빠는 방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찼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아빠는 그제야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릇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혼자 식사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분명 4인용 식탁 구석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었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젓가락질 소리가 멈췄다.
 “지금 왜 애는 안 챙기고 당신 혼자 밥 먹고 있어.”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말투였다. 아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엄마일 것이었다. 몸을 뒤척였다. 등을 돌려 책상을 마주봤다. 힐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다. 여전히 시계바늘은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그릇을 치우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또 손가방 두고 왔어. 가져다 줄 수 있지? 그리고 냉장고에서 어제 한 반찬 좀 꺼내와, 지점장님 드리게.”
 엄마는 남자와 내가 만나는 횟수를 늘이고 싶어 했다. 어디가? 아빠의 목소리가 꺼져가는 불빛 마냥 불안하게 떨렸다. 죄책감에 봉지를 꽉 쥐었다. 나는 이번에도 그 목소리를 밀쳐냈다. 문을 열었다. 봉지 속 반찬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초저녁 날씨는 생각보다 쌀쌀했다. 봉지를 들고 있는 팔을 쓸었다. 얼마 걷지 않아 상가에 도착했다. 나는 버릇처럼 고개를 들어올렸다. 한참 무용학원의 간판을 바라봤다. 간판의 반만이 제대로 깜빡이고 있었다. 봉지 속 반찬의 무게 탓에 손이 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에서 한 무리의 머리를 위로 묶은 아이들이 내렸다. 나는 도망치듯 계단으로 향했다. 이제는 버릇이 되어버린 행동이었다. 아는 아이를 만날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지금의 초라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난간을 붙잡고 빠르게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긴장이 풀렸다. 슬쩍 난간을 잡은 손을 봤다. 검게 변한 손에서 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땀이 흥건한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천천히 계산대로 걸어가자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남자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다가가기 망설여졌다. 되돌아가기에는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웠다. 나는 무용학원에서 나오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봉투를 꽉 쥐었다. 엄마에게로 걸어가 등을 가볍게 쳤다.
 “안녕하세요.”
 엄마에게 반찬 봉투를 건네며 남자에게 인사했다. 엄마는 기쁘게 웃었다. 엄마의 팔이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살짝 몸을 움츠렸다. 아이가 한 번 봤다고 이제 좀 익숙해졌나 보네요, 이거 제가 한 반찬인데 한 번 드셔보세요.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잘 먹겠습니다, 유정이도 고마워.”
 남자의 목소리로 듣는 내 이름이 낯설었다. 잔뜩 잠긴 아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문득 아빠가 내 이름을 어떤 식으로 불렀는지 알고 싶어졌다. 순간 내 어깨를 툭 치는 엄마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아니에요”
 “오늘은, 같이 식사 할 수 있니?”
 남자가 웃으며 내게 물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곁눈질로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말없이 팔로 내 어깨를 감쌌다. 가고 싶지 않았다.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엄마와 눈을 맞췄다.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엄마의 손아귀 힘이 점점 세졌다. 절로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남자를 봤다. 눈이 마주쳤지만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와 함께 간 곳은 상가 근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보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었다. 아빠는 종종 이곳을 보며 나중에 꼭 저기서 밥 먹자, 하고 말하고는 했다. 결국 지키지 못 하게 된 약속이었다. 아빠와 함께 와보지 못 했던 곳을 남자와 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복잡한 기분에 나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나를 쳐다보는 엄마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너 무용하고 싶어 했잖아. 지점장님 따님이 무용한다고 하더라. 너보다 한 살 언니야. 나중에 배우면 되겠네.”
 침묵 속에 엄마가 말을 꺼냈다. 음식이 나오기 전, 아무런 말없이 있는 내가 신경 쓰였던 것 같았다. 엄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무용 좋아하니? 남자의 물음에 처음으로 든 생각은 부럽다는 것이었다. 남자가 내 아빠였다면 아마 지금도 무용을 하고 있었겠지. 3개월 동안 무용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엄마를 오랜 시간 설득해 간신히 다닐 수 있게 된 곳이었다. 그러나 아빠의 실직으로 나는 발레 학원을 그만둬야 했다.
 “나중에 보고 싶은 공연 있으면 말해. 아저씨가 구해다 줄게.”
 정말 어쩌면 남자와 엄마가 잘되어 내가 계속 무용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남자 역시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더욱 다정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집에 들어오자 보이는 것은 소파에 앉아 공연 영상을 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요즘 들어 엄마는 발레에 관심을 보였다. 아마도 그 남자 때문인 듯 했다. 내가 보여줬던 영상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엄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용이 하고 싶어 엄마에게 영상을 보여드리며 설득하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불쾌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이거 보여줘도 내 마음 안 변하니까 가서 공부나 해. 엄마의 말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원래 무용 안 좋아했잖아.”
 엄마는 힐끔 나를 바라봤다. 그리곤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계속 보다보니까 나쁘지 않더라. 오히려 예쁘기도 하고, 그치? 남자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좋은 변화임이 확실했다. 이대로 엄마의 마음이 바뀌길 바랐다. 무용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남자를 만나는 것쯤은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책장에 놓인 흑백 무용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무용수는 어두운 무대 속 한줄기 빛 아래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할 모습이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닫힌 방문을 봤다. 방문 너머 앉아있는 남자와 엄마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런 능력 있는 남자와 엄마가 잘 된다면 다시 발레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또다시 같은 생각을 반복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사진을 봤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으로 다리를 어루만졌다. 어렵게 만들어진 근육이 풀린 것만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봉 대신 책상의 모서리를 잡았다. 천천히 다리를 들어올렸다. 내게는 아빠의 실직과 함께 내쳐진 토슈즈가 필요했다.

 “집에 있으면 돈이 나와? 나가서 일자리라도 좀 찾아봐. 유정이 수학 학원은 보내야 할 것 아니야.”
 주말 아침부터 신경질적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아침 공기는 지나치게 차갑고 축축했다. 커튼이 바람에 날렸다.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켜 시계를 봤다. 시계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몸을 뉘었다. 시계가 고장 나니 내 시간 개념이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답답했다. 천장을 보며 문 밖 상황을 예상했다. 엄마는 소파에서 자고 있던 아빠를 쏘아댔다. 그리고 아빠는 곧 겉옷을 걸치고 갈 곳 없이 밖을 헤매게 될 것이다. 착잡한 마음에 눈을 감았다. 이대로 다시 잠들면 좋을 것 같았다.
 “네, 저녁에요? 아마 괜찮을 것 같아요.”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떴다. 희뿌연 탓에 몇 번 깜빡였다. 눈동자가 뻑뻑했다. 엄마는 남자와 통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빠는 내 예상처럼 집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말이 좋아 나간 것이지 내몰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엄마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 섰다. 엄마의 통화가 끝났다. 문을 열자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거실 시계를 보니 5시였다.
 “일어났어? 엄마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 혼자 저녁 먹을 수 있지?”
 나는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대신 비척이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물을 틀고 거울을 봤다. 눈이 부어있었다. 너무 오래 잠들어있던 탓이라고 생각했다. 가볍게 물로 얼굴을 씻었다. 비누칠을 할 때쯤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나갈 준비를 하는 듯 했다. 분명 남자와의 약속일 것이다. 배나온 아저씨와 엄마의 모습을 상상했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비누칠을 하는 속도를 늦췄다. 느릿하게 세안을 끝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소파에 앉은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다. 항상 늘어진 트레이닝복을 입던 엄마에게 블라우스가 생각보다 잘 어울려 놀랐다.
 “다 씻었어? 밥도 지금 막 다 했으니까 챙겨 먹고. 다녀올게.”
 나는 식탁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빠가 늘 밥을 먹던 자리였다. 식탁 위에는 김치찌개와 서너 가지의 반찬이 올라와 있었다. 근 두 달 만에 먹는 엄마의 밥이었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 몸을 웅크렸다.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애써 잊으려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집에 들어온 엄마는 손에 들린 표를 내밀었다. 공연 티켓이었다.
 “지점장님이 네 선물이라며 주시더라. 친구들이랑 같이 보고 오래. 나중에 뵈면 꼭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알겠지?”
 보고 싶던 공연의 티켓이었다. 표를 받아들었다. 엄마가 방에서 나가자 서랍을 열고 그 안에 티켓을 집어넣었다. 책상에 앉았다. 스탠드를 켰다. 오래전 아빠가 회사에서 받아온 것이었다. 책을 폈다. 책상 속 티켓이 계속 떠올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딸, 힘들지 않아?”
 아빠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역시나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차마 아빠를 바라보지 못 했다. 아빠의 시선이 느껴졌다. 남자의 눈을 피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괜히 티켓을 넣은 서랍 손잡이만 매만졌다. 아빠는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박자에 맞추어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호흡이 일정해졌다. 아빠는 내 뒤통수를 쓸어주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방에서 나갔다. 나는 서랍을 열어 티켓을 꺼냈다. 책상 위에 티켓을 올려두고 내용을 읽어 내렸다. 나는 문득 아빠가 내게 건넨 학원비가 떠올랐다.
 오래 전 아빠가 엄마 몰래 내게 무용을 하라며 학원비를 내민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친구들과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아빠는 원래 음악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고등학교 때 음악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나를 더 안쓰럽게 보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와는 다르게 아빠는 내가 무용을 하기를 바랐다. 놀이공원에 다녀오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은 아빠의 기타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아빠가 서글픈 얼굴로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기타였다. 나는 티켓을 모서리를 느릿하게 만졌다. 고개를 저었다.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티켓을 책상 위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누웠다. 창문을 열지 않았음에도 밤공기가 찼다.

 엄마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빠를 집 밖으로 내몰았다. 이불을 다 걷어냈다. 걷어낸 이불을 뭉쳐 끌어안았다. 아빠가 옷을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으로 나가는듯하다가 내 방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다시 몸을 뉘었다. 아빠일 것이었다.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빠는 결국 문을 두드리지 않고 발걸음을 뒤로 했다. 내가 먼저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건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빠가 나가고 나는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엄마가 나를 힐끔 바라봤다. 오늘 지점장님 오실 거야. 설렘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랍 속 티켓이 떠올랐다. 뭐라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늦은 오후 현관문이 열렸다. 남자였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첫 만남보다는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티켓 감사합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다음에 또 티켓을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보고 싶은 공연들의 이름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저녁시간이 되자 거실에 전등을 켰다. 불빛이 깜빡였다. 엄마는 눈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혹시 집에 전구 있어요? 저거 오래 돼서 갈아야겠네.”
 남자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전등을 가는 것은 아빠의 일이었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전구를 찾아 남자에게 건넸다. 울컥하는 마음이 앞섰다. 깜빡이는 전구를 돌리는 남자를 밀쳤다. 남자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순식간에 집 안이 조용해졌다.
 “나중에, 나중에 하면 돼요.”
 엄마는 멋쩍게 웃었다. 쟤가 왜 저러는 건지 저도 조금 당황스럽네요. 현관문이 열렸다. 아빠가 들어왔다. 손님이 있다는 사실에 아빠는 놀란 듯 보였다. 그것은 엄마와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상황 속에서 남자는 아빠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빠는 남자를 발견한 순간 얼굴을 굳혔다. 엄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과일 깎아 올게요. 아빠의 눈빛이 흔들렸다. 모두가 거실에 앉았다. 엄마의 맞은편에는 남자가 앉았다. 나는 엄마 옆 구석 자리에 앉았다. 남자에 비해 아빠는 지나치게 초라했다. 아빠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고개를 숙였다. 사과를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럼에도 사과가 무슨 맛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당신, 인사해. 마트 지점장님이셔.”
 엄마의 말에 아빠는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내뱉었다. 순간 모든 것을 다 알아챘을 것이다. 아빠의 표정이 허탈함으로 바뀌었다. 힐끔 바라 본 아빠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아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겉옷을 챙겼다. 그 모습에 나는 몸을 일으키려했다. 허벅지를 꾹 누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엄마의 손이었다. 엄마는 나를 째렸다. 엄마가 조이는 부분이 아팠다. 힘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가만히 아빠의 빈자리를 바라봤다.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엄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현관으로 향했다.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나는 어느 순간 뛰기 시작했다. 밤거리를 헤맸다. 아빠를 찾아야했다. 한참을 헤매다 혹시나 싶어 마트로 향하던 도중 아빠를 찾았다. 마트로 건너가기 직전 횡단보도 쪽에 놓인 벤치. 아빠는 그곳에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아빠에게 다가갔다. 아빠가 내게 그랬듯 망설이다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아빠의 어깨를 감쌌다.
 “네 방 시계가 안 움직이더라. 불편했지? 있다가 들어가면 약 갈아줄게.”
 아빠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밤공기 사이로 아빠의 목소리가 흩어지고 스며들었다. 모두가 잠들고 꺼진 새벽, 아빠는 마트의 불빛에 의지했다. 깜빡이는 불빛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