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첫눈이 내렸다. 기숙사 창밖으로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바람이 창문을 뒤흔들어 깨버릴 듯했다. 두 손을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가 온몸을 에워쌌다. 눈보라도 한바탕 지나갔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바닥을 구르는 낙엽에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었었는데……. 12월의 첫날, 겨울의 시작이었다. 계절의 시작은 늘 그렇게 갑작스럽다.
돌이켜보면 우리대학의 한 계절도 제법 무르익은 듯하다. 이사회는 제법 잠잠해졌고 오랜 기간 총장 공석 사태 끝에 홍덕률 총장이 제11대 총장으로 연임을 맡았다. 1년 간 자신의 임무를 다했던 각 기관 및 대학의 간부들도 슬슬 다음 타자에게 인계 준비를 한다. 누군가는 4년간 몸담았던 대학을 떠났고 또 누군가는 대학이라는 광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어느덧 60대 노인이 된 우리대학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장애학생 지원 우수대학으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우리는……. 캠퍼스의 나무가 색색의 옷을 갈아입듯, 그곳을 거니는 우리도 무한한 변화의 기로에서 각자의 나이테를 넓히고 있다.
새로운 계절의 시작은 어떤 이에겐 낯설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간절한 바람으로 줄곧 기다려왔을 ‘변화’의 시간이다. 길가의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결코 저절로 자라난 것은 없다. 사회 구성원들의 염원과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우리가 디디고 선 이 바닥을 다져준다. 쉼 없이 돌아가는 시계바늘도 시침과 분침, 그리고 초침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드라마 ‘미생’에서는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속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왔다. 그 모습이 꼭 나 같았다. 당연한 권리를 위해 시위하는 사람들, 매일 똑같은 일상을 성실히 사는 사람들, 무엇을 위해 열중하는 사람들……. 모두들 사회 속에서 당당하게 존재하며 자기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데, 나는 부끄러웠다. 넓고 넓은 캠퍼스 안, 이게 과연 나만의 고민일까?
마치 올가미처럼 얽혀 있는 사회 속에서, 나이테가 쌓여 제법 굵어진 우리의 몸뚱이 안에서 우리는 과연 ‘나’대로 존재하고 있는가. 타인의 시선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개굴개굴, 신세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그리고 같은 길을 걷는 우리대학 구성원들에게도 묻고 싶다. 나는 ‘나’로서 당당히 존재할 때 비로소 행복하다. 내가 나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나의 행복을 위해 움직일 때, 우리는 발전한다. 사회가 발전한다.
22살의 나이, 나는 아직도 내게 쌓인 나이테가 익숙하지 않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버겁고, 한창 무르익은 타인의 모임에 막 들어선 듯 낯설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발전하여 나아가 사회라는 이름의 톱니바퀴의 작은 톱니 하나만큼의 역할이라도 잘 해내는 날이 온다면, 그때서야 겨우 내 나이테가 익숙해지지 않을까. 순간은 순간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들이 모여 영원을 만드니까. 영원을 위한 순간을 금같이 보내야 할 때다.
길가 웅덩이에 고여 썩은 물이 아닌, 흘러 다니며 자유로운 맑은 물이 되고 싶다. 타인의 작은 눈동자 안이 아닌 나의 시선에서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종강을 앞둔 지금, 한 겹의 나이테를 더하기 직전인 지금,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할 때다. 계절의 변화가 반가울 날이 오겠지. 조용한 걸음 속에서, 무한한 변화의 기적을 믿는다. 함께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