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시간, 생(生)을 닳게 하거나 다른 빛으로 물들이거나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자리에 그 시간에 헤어질 차례가 되어 놓여졌던 걸까요 / 그 말을 참았다면 다른 얘길 했다면 / 우린 이별을 피해 갔을 것 같나요.

시간이란 참으로 얄궂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공평하기만 한 시간은,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성을 지닌다. 그 뿐인가, 시간의 흐름은 생(生)의 곳곳에 녹아들어 지나온 경험에 나름대로의 색을 입힌다. 좋은 순간은 기쁨이지만, 좋았던 순간은 잔인하다. 나쁜 순간은 슬픔과 분노이지만, 나빴던 순간은 경우에 따라 한 개인의 성숙을 불러오기도 한다. 사랑의 순간은 행복이지만 사랑했던 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을 그 자리에 데려다놓는다. 설령 그것이 너무나도 큰 아픔인 것을 알았어도. 어쩌면 우리는 이미 지나버린 모든 것들에 ‘만약’이라는 기준을 들이밀고 그 ‘만약’이 실현되기만 하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이 되리라고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기대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후회와 아쉬움의 형태로 남게 된다.

 

자유의 빛에는 책임의 그림자가 따른다

영화 속 주인공인 ‘마코토’는 우연한 계기로 ‘타임리프(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돌아가는 현상)’의 능력을 얻게 된다. 그녀는 타임리프를 이용해서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껏 먹고, 노래방에서 실컷 노래도 부르고 사고 싶은 것도 잔뜩 산다. 엄청난 능력이지만 그녀가 타임리프를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소소하고 일상적이다. 그 순수한 생각들에 웃음이 나오는 건 누구나 한번은 그런 생각을 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시간이동은 대부분 한 개인 내지 집단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질감은 다소 특별하다.

그렇게 매일이 행복하기만 하던 그녀의 일상에 불현듯 균열이 찾아온다. 함께 야구를 즐기는 친구 ‘치아키’의 고백이 그 시작이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시간을 거슬러 ‘치아키’의 고백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린다. 뿐만 아니다. 또 다른 친구 ‘코우스케’를 좋아하는 여자 후배의 존재를 알고 그 둘의 사이를 좋게 만들려다 오히려 망쳐버리고,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누군가에게 대신 떠넘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분명 의도한 것은 그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영화는 ‘마코토’의 이모를 통해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일련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사실 자신에게 주어진 것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탐하는 행위는 타인의 희생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의 규칙을 거스르고 타인의 자유를 희생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치환적 행위는 그 자체로 부자연스럽다. 동시에 영화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따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것만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유일한 선택지이다. 결국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화 같은 세계의 현실적인 설득력

본 영화의 감독인 ‘호소다 마모루’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능숙하다. 감독의 최신작이자 또 다른 작품인「늑대아이」는 본 영화와 더불어 이를 증명하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이다. (「괴물의 아이」라는 작품이 가장 최신작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하나 국내에는 아직 정식으로 개봉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하나’는 늑대인간과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행복한 날들을 보내지만 어느 날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 여주인공인 ‘하나’는 막막하기만 한 현실 속에서도 쌍둥이의 어머니 역할을 다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는 초반부의 순수하고 귀여운 동심의 세계보다 후반부의 자아 찾기 과정에 집중한다. 늑대와 인간이라는 갈림길에 서서 어디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고찰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어렸을 적 개구쟁이 같은 성격으로 활발함이 넘쳤던 딸 ‘유키’는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만나면서 인간으로서, 여자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반면 어딘지 모르게 얌전하고 차분하기만 했던 아들 ‘아메’는 날 것 그대로의 대자연이 가진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늑대’의 삶을 선택한고 야생의 세계로 떠난다.

둘의 어머니인 ‘하나’는 아들과 딸이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며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에 아쉬워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가지는 의미와 한 개인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꿈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처럼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영화는, 영화를 지배하는 비현실적인 소재와 설정에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감독이 마련해놓은 세계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다보면 결코 이것이 허위와 상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흘려버릴 수 있는 세계 속에 기어코 관객을 끌어들이고 그 안에 숨겨진 현실과 진실에 동의하게끔 만든다. 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타임리프’를 소재로 한 드라마, 영화, 만화 등은 많았지만 대부분이 판타지의 구현이라는 목적성에 따르고 있어 유희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있지만 다 보고 난 뒤에 마음의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경우 비현실적인 소재인 ‘타임리프’를 가져다 썼지만 결국 핵심은 ‘청춘의 성장’과 ‘시간의 중요성’, 한발 더 나아가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세계관의 외피를 껴입고 그 안에는 우리들의 삶을 관통하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가 담겨있다. 이렇게 언뜻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공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을 멋지게 배합해내는 것은 역시 감독이 가진 가장 커다란 장점일 것이다.

 

100분을 이끌어가는 ‘장면’과 ‘음악’의 힘

영화를 보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장면의 전개에 있어 호흡조절이 굉장히 유려하다는 것이다. 가령 ‘마코토’가 자전거 사고를 통해 처음으로 타임리프를 경험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마코토’는 자전거를 타고 철길을 향해 내려가던 도중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음을 깨닫지만 이미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이전의 평화롭던 전개는 한순간에 죽음에 이르는 긴박함으로 치닫는다. 장면의 속도감은 스트링의 날카로움이 덧대진 배경음악과 어울려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탄탄하게 조여진 긴장감은 타임리프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해소된다. 철길에 부딪혀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찰나의 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영화는 ‘마코토’의 건조한 내레이션으로 하나의 단락을 성실하게 맺어나간다. 이렇듯 상황에 따라 적절한 속도감의 설정, 호흡의 완급조절이 이루어져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의 핵심 소재인 ‘시간’의 속성을 부각시키는 것에도 그 효과성이 존재한다. 똑같은 30분이라도 길게 느껴질 때가 있고 짧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겠는가. 막연하게 다가오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섬세하고 다각적인 관찰이 느껴진다.

이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는 체감 상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짧게 보여주거나, 찰나의 순간을 일부러 길게 늘여내는 비약(飛躍)의 전개가 곳곳에 드러난다. 같은 맥락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마코토’의 친구 ‘코우스케’와 그의 여자후배가 ‘마코토’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사고를 당한 뒤 시간이 멈춰버린 장면이다. ‘마코토’는 이미 타임리프의 능력을 모두 써버린 상태였고 이번에 시간을 멈춘 것은 바로 ‘치아키’였다. 세상의 모든 순간은 일시에 정지해버렸고 그것을 마치 슬라이드 쇼 효과처럼 한 장면씩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올라가던 그네가 공중에서 멈추고, 달리던 사람의 두 발이 지면에서 모두 떨어지고, 심지어 컵에 물을 따르던 그 순간의 출렁임마저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모든 것이 정지해있는 그 상황 자체가 그 공간을 오롯이 ‘마코토’와 ‘치아키’ 둘 만의 것으로 만든다. 시간의 정지가 만드는 정적과 고요함, 호흡의 지속성이 역설적이게도 극의 전개에 새로운 긴장감을 부여한다. 바로 ‘치아키’의 정체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렇다.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배경삼아, ‘마코토’와 ‘치아키’가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장면 또한 주목할 만하다. 별거 아닌 농담과 안부인사로 마지막을 말하고서 ‘마코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뒤돌아본다. 그러나 ‘치아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잠깐의 울음 뒤에 ‘치아키’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미래에서 기다릴게’라는 약속을 건넨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의 안타까움을 뒤집는 힘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조직하는 음악과 장면의 힘이 드러나기도 한다. 풍경을 전체적으로 잡아주는 구도와 두 인물을 중심으로 잡아주는 구도를 적절히 사용하여 관객이 예상하지 못한 지점의 긴장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만약에 ‘치아키’가 저 멀리에서 다시 걸어오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비췄다면 장면의 아름다움이 훨씬 덜했을 것이다.) 또한 인물의 심리 변화에 맞춰 장면 전환의 속도감을 조절하고 음악의 진폭도 변화시키기도 한다. ‘마코토’가 다시 뒤돌아보며 ‘치아키’의 부재를 확인하는 그 순간, 잔잔하고 부드럽기만 했던 배경음악은 한꺼번에 밀려들듯이 단조풍의 멜로디로 전환한다. 헤어짐의 장면에서 아쉬움의 정서를 고조시키는 것은 분명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가진 힘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힘에 살을 보태어 울컥하는 감상을 만드는 것은 장면의 구도와 음악의 공이 크다. 감독은 이렇듯, 서사 구조에 있어 영화적인 기법과 청각적 장치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글이나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선을 설득시키고 그 섬세함에 충분히 젖어들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의 서정

영화는 ‘시간’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주제에 관해 사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파스텔 톤의 색감, 클래식을 기반으로 한 배경음악, 내면의 성숙이 다 일어나지 않은 주체의 섬세한 심리묘사, 그리고 주변인물과의 관계를 통한 성장을 그려내며 청춘의 서정성을 구현하는데 성공한다. 좋아하지만 단순히 ‘사랑’이라고 뭉뚱그리기에는 어쩐지 통속적이고, 그리워하지만 단순히 ‘보고 싶다’고 말하기에는 어딘지 부족한 감정의 총체를, 감독은 기어코 관객들에게 설득시키고야 만다. 동시에 사춘기 소녀의 모습을 통해 그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청춘의 불안 심리와 보편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첫사랑의 정서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요컨대,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감정의 핵심은 사랑, 우정을 포함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이름붙이기 힘든 모호한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느낀 첫 번째 감정은 ‘섬세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섬세함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성 안에서 가시적인 형태로 구현되기도 하지만 내가 느낀 섬세함은 감독이 가진 등장인물들에 대한 ‘섬세한 시선’에 가깝다. 영화의 서사구조는 ‘마코토’와 ‘치아키’의 관계성을 큰 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또 다른 친구인 ‘코우스케’를 통해 우직한 우정의 맛을 느낄 수 있고, 그를 좋아하는 ‘카호’를 통해서는 사춘기 소녀의 풋풋한 짝사랑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치아키’를 짝사랑하면서 동시에 ‘마코토’의 단짝친구이기도 한 ‘유리’의 모습을 통해 사랑, 그 이전의 헌신과 희생을 느낄 수 있다. ‘마코토’의 이모인 ‘가즈코’의 사려 깊은 마음씨에 감동을 받은 이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감독은 이렇듯, ‘마코토’와 ‘치아키’를 제외한 주변의 인물들에게도 각자의 개성과 의미를 부여하고, 한 개인으로서 영화 속에 존재하는 당위성을 심어두고 있다. 이들을 보고서 느끼는 감동은 우리들 추억 속의 누군가와 닮아있거나 맞닿아 있어, 결코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로부터 느끼는 감동에 뒤처지지 않는다.

 

이루어질 수 없어 아름다운 것들

본 영화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어 아름다운 것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결말부에서 ‘마코토’와 ‘치아키’가 헤어진 이후에 아마 그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차이로 인하여 다시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그렇다면 관계가 지속될 수 없는 미완성은 결국 비극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름답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보다 ‘이루어질 수 없어 아름다운’ 아련함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혼자서 숱한 밤을 애태웠던 짝사랑, 헤어진 이후에 더 이상은 연락이 닿지 않는 옛 친구 따위가 그렇다. 내 삶의 전부인 것만 같았던 인연들이, 알고 보니 각자의 인생이라는 선 안에서 교차점으로 만나 짧게 스치고 지나감을 깨닫는 것. 시간이 오래 지나 숙성이 된 기억들이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가끔 생각날 때 꺼내보면서 웃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이루어질 수 없어 아름다운 것들’이다.

‘마코토’와 ‘치아키’의 만남은 그렇다. 짧은 순간 동안 사랑과 우정 사이의 날카로운 감정을 겪고 이제 헤어져야만 하는 아쉬움은 달래거나 잊으려 애쓰기보다는 그저 간직하는 것이 오히려 서로를 위한 일이다. 두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마지막을 향해 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끝을 향해가는 시간을 힘껏 껴안음으로써 함께하고 있는 순간들은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마지막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영원함을 획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봄 한철, 겨우 내의 격정을 인내하고 살며시 움을 틔운 벚꽃 잎이 아름다운 이유는 금방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 해의 봄 동안만 느낄 수 있는 향기와 정서가 존재하고 이것이 다음의 계절을 기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상을 채우는 대부분의 것들은 영원불멸하지 않기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절만의 이야기는 영원한 추억으로 남겨둘 수 있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영화의 결말은 다소 열린 형태를 지향한다. ‘치아키’는 본인이 살던 시대로 다시 떠나고 ‘마코토’와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난다. 그렇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다.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을 위해 떠나는 잠깐의 여행처럼 느껴진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고 더 나은 자신이 되어 먼 훗날 만났을 때, ‘우리 참 좋은 모습이구나’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것이야말로 미래를 기약하게 만들고 지금 청춘의 날들을 빛나게 하는 ‘성장’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내 삶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렸던 것 같다. 내가 속해있던 공간 속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던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떠나왔을까. 나의 기억 저 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고 살았던 걸까. 그리고 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우리의 첫 인사는 어떤 말로 시작하게 될까. 영화 속 대사처럼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서로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을, 우리는 다 했던 것이 맞을까. 그랬다고 믿는 것이 후회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일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어떤 한 줄기

한국과 비교하여 일본은 만화, 애니메이션 시장이 크게 발달한 국가이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품이 다수 존재하며, 애니메이션이 협소한 장르적 틀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를 형성하며 그 명맥과 일본 고유의 가치관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있어 가장 커다란 흐름은 ‘지브리’를 중심으로 움직여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웃집 토토로」,「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하울의 움직이는 성」,「벼랑 위의 포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등이 지브리 계열의 작품이다.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적인 전통적 세계관과 판타지의 구현, 그리고 그 안에 녹아있는 현실에 밀착한 문제의식, 일본 특유의 동화적인 서정성 등이 이들을 설명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지브리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흐름을 누가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차기주자가 바로 본 영화의 감독인 ‘호소다 마모루’와 「초속 5cm」,「언어의 정원」등으로 국내에 알려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다. 두 감독을 비교하자면 호소다 마모루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이야기 중심의 영화에 가깝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미지 중심의 영화에 가깝다. 탄탄한 스토리, 비현실적인 장치를 통한 진리의 구현, 보편적인 공감대를 확보하는 명확한 메시지와 주제의식이 호소다 마모루의 가장 큰 매력이다. 반대로 사진에 가까울 정도의 섬세한 이미지, 풍부한 색채를 통한 풍경 묘사, 삶의 한 순간을 관통하는 감정의 표출은 신카이 마코토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건의 얼개가 다소 느슨하고 스토리의 구성 면에서 탄탄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는 우리나라와 달리 국가의 문화를 이루는 큰 축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흐름을 장악하던 지브리 계열에 이어 이를 계승할 감독이 누구인지,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두 감독의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작업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분명한 것은 애니메이션이 그저 아동들을 위한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양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실체화 할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지만 이 안에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문화를 향유하는 집단들의 가치관, 생각을 가장 대중적이고 쉽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시각적 구현을 위한 기술적인 측면의 발달과 오락의 기능 이전에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것들을 남기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애니메이션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신준환/국어교육과]

 

<2007년 그 해 여름>

007년 그 해 여름, 시달소라 불리던 영화는 2015년 여름, 시간을 달려서 다시 나에게로 왔다.

학교 출품 일환으로 영화 평론 목록을 살피던 와중에 눈에 띄는 영화 제목이 있었다. 한번 본 적이 있어서 그런 것 이였을까? 제목만으로도 나의 심금을 울렸던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었다.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간다.

고2 여름, 장래에 대한 막연한 꿈만이 자리 잡고 있던, 그때 그 시간들은 내가 살아왔던 인생에 있어서 추억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때는 그저, 학교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쳇바퀴 속에 머물렀던, 너무나도 지루해서 어서 끝내기만을 기다리던 나날 들 이였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었다. 그토록 지겨웠던 날의 바람마저 맵고 덥던 그 해 여름, 우연히 “시간을 달리는 소녀”란 영화가 나에게로 찾아왔었다. 수업의 일환으로 보게 된 영화였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영화 속의 소녀와 그 영화를 바라보던 소년의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영화를 매번 떠올릴 때 마다 함께 피어오르는 그 시절의 추억이 아쉽고도 아름다워서 슬프지만,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영화만 있으면 나는 언제나 고2때로 타임리프가 된다. 영화 속에서 언제나 소녀인 주인공처럼, 나도 소년이 된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뭉게구름이 몸을 맡기듯, 크레파스 색보다는 파스텔 색이 더 어울렸던 영상미, 그와 함께 묻어나던 옅은 개나리 색의 OST는 영화를 한번 보면 잊을 수 없게 만든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은은하게 퍼지던 <여름하늘>곡은 앞으로 시작될 영화의 영상미와 색깔을 고취시켰고, 여름향기가 풍기도록 하였다. 이처럼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함께 울리던 <가넷>,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OST들은 주인공이 겪는 상황과 심정변화를 남일 같지 않게 감정이입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주인공과 관람객은 서로 다른 두 선상 위가 아닌, 하나의 선상에 놓여져 서로 마주보게 되는 신비로운 순간을 겪게 된다. 그 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한동안 주인공을 잊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서 영화의 장면들이 안타깝게 바래져 가더라도, 기억에 머문 음악이 들려올 때면, 우린 재회한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서로의 얘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재회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는 주인공인 마코토의 성장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마코토는 우연하게 타임리프 능력을 얻게 되고 이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뜻하지 않게도 주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입히게 된다. 이에 마코토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고 이를 매듭짓기 위해 타임리프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코토는 한껏 더 성장하게 된다. 여기서 성장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앞서 얘기 했듯이 이 영화의 주인공은 관람객과 하나의 선상에 놓여, 서로 마주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한 그의 성장은 “타인의 위한 삶과 자신의 위한 삶에 대한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을 알게 된 것” 이라고 보는데, 이는 나의 ‘삶은 본인의 선택이고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된다’라는 견해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즉, 관람객의 경험에서 비롯된 시선이 마코토의 성장을 의미하게 됨을 말한다. 이처럼 그의 성장에 대한 해석은 개개인의 몫이자 또 다른 재미이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가고, 그대들에게 이를 맡기고자 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여러 번 보길 권한다. 소재가 독특하고 재미있어서, 즐기면서 보기에는 참 좋다. 즐기면서 보았다면, 다음 기회가 있을 땐 영화의 영상미, 음악, 감독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보았으면 한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보려고 하지 말고 나눠서 보았으면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영화는 의미 없이 스쳐가는 기억이 아니라 하나의 종단점이 될 것이다. 동심(童心)이 그리울 때, 학창시절이 그리울 때,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생각날 때, 아버지의 얼굴이 그리울 때, 친구가 그리울 때 그리고 그 모든 추억들로부터 이 영화는 우리를 그 때로 타임리프 시켜 줄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 속에서 언제나 소녀인 마코토처럼, 나도 언제나 소년이 된다. [김근태/임베디드공학]

 

<당신의 시간은 어디를 달리고 있나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

 

누구나 한 번쯤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길 꿈꾼다. 내가 초등학생 때 쓴 일기를 보면 약 10년이 지난 현재에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우주복을 입고 생활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기술은 개발되지 않았다. 수 세기 동안 인류는 타임 리프를 위한 연구를 지속해 왔다. 또한, 시간이동을 소재로 하는 작품도 많이 있다. 이는 흐르는 시간을 잡아두고 싶은 인간의 간절한 바람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던 고등학교 소녀 마코토가 우연한 계기로 타임리프 능력을 가지게 되면서 시작된다. 마코토는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등굣길은 항상 턱걸이로 지각을 면하고 공부는 겨우 뒤처지지 않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소녀는 지금 인생의 비탈길을 내달리고 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좋았던 그녀의 시간은 이제 유년기를 지나 성년이 되는 길목에 있다. 선생님은 문과냐 이과냐 진로를 선택하라고 하고 함께 어울리는 치아키와 코스케는 그들을 짝사랑했던 여학생들의 고백을 받으려 한다.

7월 13일. 일본어 발음으로 ‘나이스 데이’라 불리는 날 마코토의 운세는 최악의 날이라고 한다. 아침부터 그에 맞는 재앙을 연달아 겪는다. 그리고 방과 후 과학실 구석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놀라 넘어지면서 작은 물체에 부딪혀 환상을 본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전거를 타고 이모에게 향하던 마코토는 최악의 날다운 삶의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죽는 순간 마코토는 생각한다. “설마 죽겠나 했는데 죽는구나.” 다음 순간 마코토는 자기가 시간을 건너 살아 있음을 발견한다. 그렇게 자신의 타임리프 능력을 알게 된 소녀는 13일의 실수들을 바로잡고 노래방 시간을 늘리고 저녁 식사 시간에는 철판구이를 먹은 날짜로 돌아가는 등 소소한 일상을 이어나간다. 처음 마코토의 상의를 받고 “네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는 가끔 있는 일이야.”라고 이모는 놀랍지 않다는 듯이 말한다. 준엄한 교훈을 깨우쳐준다. “그런데 네가 이득 본 것만큼 손해 본 사람이 있지 않겠니?” 소녀는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결과의 연쇄를 낳는다는 무거운 사실에 눈뜬다. 코스케가 후배의 고백을 받은 오후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치아키는 돌연 마코토에게 묻는다.

“우리 사귈래?” 당황한 마코토는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려 없었던 일로 만든다. 하지만 이 일이 마코토를 전력을 다해 달려야하는 계기가 된다. 마코토는 직면하게 된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기 위해 달리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달린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피한 것에 대한 뒤늦은 후회를 되돌리려 달린다.

한국어 제목의 ‘달리다’라는 아마도 주인공의 이런 힘차고 씩씩한 모습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 원제의 동사(かける)는 ‘건너다’에 가깝다. 마코토는 그저 달리기보다 미래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을 건넌다. 그리고 이 뜻은 또 ‘かける 그리다(描ける)’라는 동음이의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조금은 낡은 타임리프란 소재를 이용해 주인공이 유년기를 벗어나 성년기로 가는 새로운 ‘시간을 그린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과를 선택할지, 문과를 선택할지 결정 못 하고 배회하는 청춘은 지나간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 자신의 감정과 마주한다.

순간 정지된 이미지와 덩그렇게 남겨진 운동장이 여백의 아쉬움을 토하며, 그 여운이 정말 진하다. 마코토가 오고 가며 다시 쓰는 하루의 에피소드는 어느새 정말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되어버렸다”는 치아키의 대사는 더욱 감독의 의도를 드러낸다.

시간이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짧게 느껴진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가느냐고 하실 때가 있다. 이것은 그저 흐른 세월에 대한 한탄일 수도 있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뇌의 기억세포가 사라지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24개월 된 아이는 평균적으로 24시간, 수면시간에 꾸는 꿈까지 하루를 온통 기억한다고 한다. 또한, 그 기억이 일주일 동안 지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60세 이상의 경우 깨어있는 동안의 70%가량을 약 3일간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에게 시간은 그야말로 화수분이다. 시간이라는 개념도 불명확하며 지나간 추억에 대한 그리움도 크지 않다. 사춘기는 한번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그리움을 느낄 때 시작된다고 한다. 계절의 냄새에 연연하게 될 때, 친구로만 생각했던 사내아이의 “사귀어볼래?”라는 갑작스러운 한 마디를 모른 척해놓곤 잠 못 이룰 때 성년은 유년기를 밀어내며 다가온다.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어느 날 전력 질주하면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 씩씩하고 맑은 소녀 마코토를 통해 그 섭리를 매우 재미있고 아름답고 성숙하게 그려낸 영화이다.

일본 특유의 해학과 집단 따돌림이라는 사회적 이슈, 10대들의 불안정한 정서에 대한 관찰이 뛰어나다. 또한, 위기를 맞아 변하는 여타 작품과는 달리 인물의 성격과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가운데 웃음과 깨달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세계적인 미술가 앤디 워홀은 말한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일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춘기를 지나 성년이 되면서 많은 것을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그 선택이 옳은 것일 수도 옳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나쁘더라도 우리에게 타임리프 능력이 생기지 않는 한 하지만 그러한 선택을 하고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다.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느껴왔던 인생의 진리이고 앞으로도 지고 가야 할 짐이다. 하지만 미래에 나를 기다려줄 치아키와 같은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시간을 건너는 것이다. [김아연/직업재활학과]

 

<영자의 전성시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좋았던 날을 ‘전성시대’라고 말하곤 한다.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그녀의 환상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난 후, 내가 알고 있는 ‘전성시대’라는 개념의 의미가 과연 맞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영화 속에서 과연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여주는 장면은 어떠한 부분일까. 어쩌면 그녀가 급격하게 산업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적응하고 그 사회가 원하는 여성상에 맞춰지게 되는 과정을 전성시대라고 말하는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당시 사회속의 전형적인 여자를 대표하는 희생양이다. 아마 제목의 ‘전성시대’는 원래 본의 미를 표현하는 ‘온전할 전’의 ‘全’자가 아닌 ‘돈 전’자인 돈을 의미하는 ‘錢’자와, ‘이룰 성’의 ‘成’자가 아닌 ‘아름다울 성’자로 여자의 아름다움을 뜻하기도 하지만 또한 여자의 성을 표현하는 ‘娍’자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싶다. 여자의 성이 돈으로 환산되어지는 비참한 현실을 말해주는 제목이다.

이 영화가 나온 시대는 1970년대, 산업화의 시작으로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루어지는 시대다. 이때 빈부의 격차가 커졌고, 하층계급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물질만능 주의 사회가 되어가며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 보다는 물질이나 돈에 큰 가치를 두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급격한 근대화의 영향으로 20년 만에 농촌의 인구비율은 70%에서 30%로 줄었고, 대부분의 농촌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서울로 상경했다. 그중에서도 돈을 벌기위해 상경한 여자들의 삶은 남자들의 삶보다 쉽지 않았다.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제약 되어 있었고, 큰돈을 벌기도 쉽지 않았기에 매춘으로 전략하기 십상 이었다. 서울에서의 ‘성공’이라는 환상에 젖어 오지만 이 시대가 여성에게 열어주는 문은 많지 않았고 결국 매춘으로 전락한 그녀들은 자신에게 오는 무기력감과 우울증에 끝내 자살시도까지 하곤 하였다. 이 시대의 하층민의 남성들의 삶 역시 다르지 않았다. 급격한 사회의 변화로 그들 역시 혼란을 겪었으며 그들에게도 주어진 직업이 많지는 않았고 힘들게 하루하루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그들에게서 보여 지는 성향은 대부분 육체적이거나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답답함과 욕망을 해소하기 위하여 성적 쾌락을 추구하게 되었고, 여성의 성을 물질로써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1970년대에 농촌에서 돈을 벌기위해 상경하지만 결국 사회의 희생양이 되어버리는 여자의 삶과 급격한 사회의 변화속의 남성들의 삶을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영화 속 에서 잘 보여준다.

영자는 집안의 가난함 때문에 돈을 벌기위하여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그녀가 처음 하게 된 일은 부잣집의 식모살이이다. 하지만 그 집안 아들에게 겁탈을 당하고 쫓겨나게 된다. 이 모습은 이 당시 근대화속에서 돈을 벌기위하여 상경하는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들을 보여주며, 여성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기도 힘들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쫓겨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한다. 그 후 그녀는 더 나은 수입을 위하여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지만, 그 역시 나은 생활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영자는 계속 하여 돈을 벌기 위하여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고, 그녀는 버스 안내양을 하던 도중 한쪽 팔을 잃고 만다. 이것은 그 당시 여성들의 꿈이 좌절되는 모습을 상징한다. 영자의 한쪽 팔은 돈을 벌기위해 올라오는 여성들의 희망찬 꿈과 다짐을 말하지만 그것이 사라지며 여성들의 생산능력과 적은 일자리의 기회마저 없어지는 좌절되는 현실을 뜻하는 것이다. 좌절된 상황 속에서 여자들은 매춘의 길로 빠지거나 우울감과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영자 역시 일을 할 수 있는 팔을 잃고 난후 매춘의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엔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결혼을 하여 안정된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여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당시 돈을 벌기위하여 상경해오는 하층민 여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영자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첫 번째로 영자는 매춘의 유혹에도 떳떳한 자기애를 과시하였다. 불편한 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춘에 빠져들게 되었지만, 그녀는 남자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곤 하였다. 이런 모습들은 떳떳한 해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다. 두 번째로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결혼 속에서 오는 안정된 삶이다. 영자는 창수와 안정된 살림을 차리기를 원하여 ‘매춘’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돈을 모은다. 그리고 영화 곳곳 에서 창수에게 자신을 책임 질 것이냐고 묻기도 한다. 이를 보면 여성들은 자신을 책임져줄 남자 그리고 안정된 결혼생활을 원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자는 자신의 과거를 덮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과연 그녀가 결혼을 해서 행복해졌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영자에게 할 일이 생기고 안정된 가정을 생겼다는 장면 설정은 그 당시 하층민 여성들이 원하는 것이 ‘결혼’이라 추측 해볼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는 1970년대의 가부장적인 사회 모습 또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당시에는 여성보다는 남성의 권위가 높았으며, 남성들은 자신의 욕구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하여 돈을 주고 여성의 몸을 산다. 여성을 한 인간으로 대해 주기 보다는 그저 자신의 욕망 해소를 위한 도구처럼 대한다. 여성과 남성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동일한 가치를 공유해야 하는데, 과연 여성만이 남성에게 꼭 보탬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가. 영화 속 목욕탕 보일러실에서 ‘김씨’는 영자에게 너는 창수랑 있을 때 +1이 아닌 –1이 되게 한다고 하며 몸을 파는 영자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나무란다. 여성에 대하여 비판하고 자신의 잣대를 갖다 대는 ‘김씨’의 모습은 상당히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영자에게 창수의 존재가 +1이 되는지도 의문이다. 아마 영자에게는 창수가 자신에게 보탬이 되는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김씨’는 영자의 일을 좋지 않게 보며 창수 곁을 떠나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움츠러들기보다는 스스로 떳떳한 존재가 될 것을 다짐한다. 그녀는 창수에게 보탬이 되어 살림을 꾸리기 위하여 ‘매춘’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열심히 돈을 모은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가 보탬이(+1) 되기 위하여 하는 방법인 ‘매춘’이, 사실상 그녀가 창수에게 –1이 되게 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보아 가부장적 사회속의 여성의 한계가 보여 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떳떳한 존재가 되려는 영자의 모습을 보여주어 여성주체의 변화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하지만 남자인 창수는 영화 속에서 영자에게 희망을 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월남전에 갔다 와서 우연히 매춘에 빠진 영자를 발견한 창수는 그녀를 도와주기 위하여 자신의 돈으로 그녀를 보호한다. 그리고 영자를 병원에 데려가 병을 낫게 해주기도 하며, 의자의 다리를 떼어 영자에게 팔을 만들어준다. 팔을 붙여주는 것은 다시 그녀에게 희망과 꿈을 넣어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팔을 잃고 난후 몸을 파는 일을 통하여 타락해버린 영자는 창수를 만난 후 점차 몸도 회복되고 정신도 회복되며 꿈과 희망까지 얻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아가게 된다. 하지만, 희망 속에서 하층민 여자들은 한계를 가졌다. 그녀는 자신이 창수라는 희망에게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그를 위해 떠난다. 이 부분으로 보아, 여성들은 혼자보다는 남성을 통하여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지만, 매춘에 빠지거나 하층민 여자들은 그 희망마저 갖기 힘들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녀들이 결국 갖게 되는 건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 영자가 몸이 불편한 남자와 결혼을 한 것처럼 그녀들에게 정상적인 삶이란 허용되기 힘든 각박한 현실을 나타낸다.

마지막 장면은 그녀의 환상일까? 아니면 그 시대의 여성들의 판타지일까, 이루기 힘든 현실을 투영하는 비극적인 장면일까. 죽은 줄 알았던 영자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과거를 털어버리고 결혼을 하여 안정된 가정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녀의 남편이 나타나는데 그는 한쪽다리가 불편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하층민 여자나 상경해온 여자들이 정상적이거나 안정된 삶을 가지기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 시대에 여자들이 원하는 건 안정된 삶에 안주하는 것 이였지만, 매춘에 빠진 하층민의 여자들에게 결혼이란 쉽지 않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정상적인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 이 부분은 힘든 생활 끝 결국 안정된 삶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결혼이 그 당시 하층민 여성들이 이루기 힘든 환상 같은 헛개비었다는 보여준다.

급격한 사회 속에서 상경한 여성들이 매춘으로 빠지게 되는 모습은 20C인 현재에도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도 보여 지듯이, 여자들은 남자들과 같은 공간속에서 보조적인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술을 따라 주거나, 그들이 춤을 추자면 같이 춤을 춰야하고 그리고 몸에 손을 대면 싫더라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지식이 없거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은 직업을 갖기가 힘들며, 직장을 갖는다 하더라도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임금의 한계도 갖는다. 물질 만능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물질적으로 변해가며 모든 가치의 중심이 돈으로 변해간다. 이런 시대에 여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몸을 팔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여성의 성이 돈이라는 것과 환산이 되고 진정 가치 있는 것이 가치 있게 여겨지지 못 하는 것이다. 이것은 20C에 들어와서도 여전하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힘든 상황속의 여자들은 직업의 한계를 가지고 쉽게 돈을 벌기 위하여 매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1970년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예전에는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성을 팔려고 하기 보다는 누구에게 끌려오거나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수동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여성들은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아니면 자신의 성을 직접 상품화하기를 원하고 남성들의 욕망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성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자들은 술자리에서 동등한 대우보다는 술대접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약자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문학이나 영화의 보편성으로 볼 수 있다. 시대가 지나도 많은 것이 바뀌는 것 없이 똑같은 삶과 가치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나온 영화라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볼 것이 아니라 그 당시와 지금과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변해야 할 것을 모색해야한다.

영화 속에서 영자는 타락해가는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인물로 보여 지기도 했다. 그녀의 의지가 아닌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영자의 타락을 안 좋게 만은 볼 수 없는 것 같다. 생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 그리고 사회상이 만들어 내는 여자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영자의 행동을 비판하고 나쁜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그 시대에 희생이 되어갔던 여성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려고 노력했던 여성들로 기억해야할 것이다. 가슴속에 품은 작은 소망을 실현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같이 공감해야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생활을 찾은 영자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 시대 여성들의 꿈과 현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권진선/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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