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하늘은 새카맸고 우레가 치기 시작했다. 조금 뒤 세차게 비가 내릴 것이다. 그는 장우산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날씨로 봐서는 어떤 우산을 쓰고 나간다 하더라도 물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을 면할 수 없을 텐데. 생각 같아서는 우비까지 입고 나가고 싶었으나 검은색 양복 위로 우비를 입는 것은 터무니없는 발상이었다. 구두 안쪽까지 축축하게 젖겠지만 그는 결코 발목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양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단순한 사람 간의 예의를 넘어 강박관념에 가까운 잘 된 차림새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고수해오던 것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서부터 내려오던 고질적인 문제였다.

우중충한 날씨를 노려보던 그는 빳빳하게 다린 흰 셔츠를 입고 검은색 양복 상의를 걸쳤다. 아내와 이혼하기 전이었다면 그녀에게 넥타이를 매달라고 부탁했겠지만 지금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과 이 년 전만 하더라도 아내는 졸린 얼굴로라도 순순히 넥타이를 매어 주었다. 부자간이 나란하다며 지긋지긋한 얼굴로 아버지와 그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과 아내의 얼굴은 어쩐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여자들은 늘 스스로를 강박관념에 옭아매면서 남자들의 강박관념에는 지나치게 박했다. 아내는 같은 옷을 절대 이틀 연속으로 입지 않으면서 매일 저녁 셔츠를 빳빳하게 다림질하는 그에게 핀잔주기를 버릇처럼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와 그의 아버지가 여자들의 냉대 속에서 약자처럼 굴었느냐면 그것은 절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오히려 초연하고 무탈한 쪽이었다. 물론 그는 아내가 다려 주는 셔츠가 흡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다림질을 했던 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보다 더해서 당신의 손으로 하지 않는 모든 일들을 못 미더워하는 편이었다. 그는 그러한 아버지의 강박관념과 애정 표현에 서툰 어머니의 자질을 물려받았다. 그것이 별로 좋은 조합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한다. 아내는 그를 견딜 수 없어 집을 뛰쳐나간 것이 아니라 지쳐버린 것이었다. 그의 마음이 처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믿고 알았으나 날이 지날수록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그가 알았을 때, 그는 이별을 맞은 여느 다른 남자가 그렇듯이 참으로 쓸쓸하고 외로웠다. 그리고 아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척하는 것이 아내에게 좋은 일임을 깨달아 그렇게 하였다. 원망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단언할 순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그때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시간이 약이라는 문장은 곱씹을수록 명문이었다. 열 두엇 정도 나이를 먹고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는 시간이 다 상처를 치료해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체념의 문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아무리 후회되고 가지고 싶었던 것이라도 포기하고 난 다음이라면 결국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것이었다. 아내와의 이별은 그런 것과 같은 종류다. 헤어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과 아프지 않다는 것은 같은 선상을 하지는 않는다.

 

쏴아아

쏴아

 

문을 덜컥 열고 보니 빗소리가 어마어마했다. 그는 장우산을 집어 들었다. 비가 무섭게 쏟아져도 그는 반드시 가야만 했다. 그러면서 그는 심호흡을 했고, 느리게 우산을 폈다. 사실은 조금도 발을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았으면서 그는 그렇게 했다. 이런 장대비에 누군들 밖으로 나가고 싶겠느냐고 하겠지만 사실 강박관념이 심하고 무뚝뚝한 남자는 자기 고집이 대단하고 세상 천지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도 이런 궂은 날에 그가 집 밖을 나서면 옆집에서는 아니 대체 누가 이 날씨에 나오는 거지? 하고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그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날씨, 특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천둥 번개가 그치지 않는 날씨를 무서워했다. 사실 누구라도 이런 날씨는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투두둑, 투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산에 세게 부딪치는 빗소리일 것이다. 그는 사실 아침부터 기분이 형편없었다. 침대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그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기분이 나쁠 때면 아내는 주문을 외우라고 했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던 것이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따뜻한 감각을 전해 주는 언어들은 찬 손을 비비는 정도의 온정만 흘리고 사라져 갈 따름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날씨 탓이었다. 지금의 기세라면 비는 절대 오늘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365일 중에 그가 유일하게 쉬는 날이었고 반드시 잘 차려입고 나가야만 하는 날이었다. 나머지 364일 중에 그가 잘 차려입지 않는 날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긴 어렵겠지만, 여하간 오늘은 더욱 특별했으므로 그가 괜히 날씨 탓을 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우산을 접고 검은 차에 올라탄 그는 침묵으로 가득한 차 안에서 혼자 운전대를 잡았다. 누군가 옆에 앉지 않으면 그는 더럭 겁이 났고, 때로 외롭고 쓸쓸하였다. 차는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그는 오히려 차가 털털거리는 소리라도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히터와 라디오를 틀었다. 몇 번 지직거리던 라디오는 주파수를 맞추자 옳은 소리를 냈다.

“이봐요, A씨.”

“왜 그러시죠?”

“당신 혹시 세상에서 가장 큰 개가 뭔지 알아요?”

“그게 뭡니까? 셰퍼드?”

“아니오.”

“아, 난 개에는 완전 문외한이라고요.”

“좀 더 생각해봐요. 포기하지 말고.”

코미디 프로그램인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개? 대단히 흔한 넌센스 퀴즈인 것 같은데 좀처럼 답이 떠오르지 않아 그는 핸들을 잡은 손가락을 딱딱거렸다. 답을 알 것 같은데 어렴풋이 떠오르지 않아 미간을 찌푸린 참이다. 게스트로 섭외된 모양인 A씨는 아예 답을 찾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이봐요, A씨. 좀 더 생각해보라고요. 개그맨은 킬킬거렸다. 방청객들이 웃는 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차 내부를 진동시켰다. 그제야 그는 살 것 같았다. 비는 여전히 억수로 쏟아지고 앞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누군가가 옆에라도 탄 양 아무렇게라도 말을 걸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자, 답은 터무니없이 쉬워요. 분명 A씨가 알고 있는 단어일테니까요.”

“힌트라도 주시죠.”

개그맨은 어떻게 해야 신선하고 흥미로운 힌트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문득 그는 답이 알 것 같았다. 여전히 A씨는 방청객들에게 조롱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고 개그맨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A씨를 놀려댔다. 오늘처럼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컨셉이려니 했을 것을 그는 몹시 A씨가 가엾어졌다. A씨는 아직도 문제의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A씨는 그 문제의 답을 알면서도 엉뚱한 말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답을 듣지 않고 남자는 라디오를 껐다. 라디오를 끄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다시 외로워졌으나 그는 다시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그럼에도 개그맨이 킬킬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했다. 이봐요, A씨. 이봐요, A씨…….

그는 왈칵 울고 싶었다. 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차를 두드려댔으나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를 두드리는 소리를,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물에서 나 물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그러니 물을 우울이라고 이름 붙이면서도 사랑하며 떠나지 못해왔을까. 사람이 물을 마시면 살고 물이 사람을 마시면 죽는다.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물을 한움큼도 마시고 있지 않았고 물은 그를 삼킬 듯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운전을 계속했다. 가야할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찻길이 미끄럽고 심사는 참을 수 없이 외롭고 괴로웠지만 그는 가야만 했다. 축축이 젖어 냄새가 날 것 같은 양말을 생각하면 그냥 도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는 운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봐준다면 그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난 지쳤어.”라고 말할 것이었다. 과거 아내가 있었을 때는 언제나 그녀의 말에 “난 괜찮아.”라고 말했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언젠가 아기가 생기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걱정하던 그가 더는 필요 없어졌듯이.

과거를 과거라 생각한다. 돌이키려고 애쓸 것 없다는 것은 그가 인생을 살면서 얻은 교훈 중 하나다. 한때는 사실을 부정하며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애썼으나 결국에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거나 처음의 것처럼 치유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차가 어두운 터널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사방이 캄캄해지며 앞이 어두워졌지만 그는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간에, 이런 날씨엔 누구도 차를 몰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남자는 좀처럼 웃지 않는 얼굴에 미소를 엷게 걸었다. 무작정 그는 차를 몰고 달렸다. 차를 모는 것이었으나 그가 달리는 것이었다.

그가 평생 후회한 것이 있다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것이다. 그녀는 그의 일생에 몇 안 되는 햇살이었는데, 그는 그 햇살을 도장을 한 번 찍는 것으로 놓쳐버렸다. 그가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은 사실 운명이나 유전과 다를 것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아버지에게도 당신이 생각하기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가 생각하기엔 전혀 아니었지만. 여하간 아버지에게는 늦둥이 동생이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했으나 아버지 당신은 그 늦둥이 동생을 매우 아꼈다고 들었다. 아버진 그 동생이 뛰놀았던 집 연못을 잊지 못하고 평생을 못을 가꾸는 데 썼다. 그 못에서 그는 숙부가 뛰놀았던 것처럼 뛰놀며 자라났다.

그는 아버지에게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강박관념과 동생에게 갇혀 일생을 살고 있었다. 무릎을 걷어 부치면서 못을 청소하고 있는 아버지를 그는 사랑하였으나 노쇠한 나이임에도 아버지를 부려 먹고 있는 그 못은 죽어라고 미워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결혼하게 된다면, 아내가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야 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못을 매우 미워하여 쳐다보기도 싫은 것이지만 아내는 아버지처럼 그 못을 사랑하여 매일 가꾸고 들여다보는 순진한 이라면 좋겠다고. 그래서 아버지를 위로해 주는 여자를 만나야만 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사소한 것으로 크게 다툰 동생이 집을 뛰쳐나간 뒤 소식을 듣지 못했다던가 하는 뒷일은 아버지 가슴에야 큰 한으로 남을 일이었겠으나 그에겐 아니었다. 아버지가 늘 그 어린 얼굴을 그린 것처럼 그에게 숙부는 그냥 그 못이었다. 사람도 뭣도 아닌 작은 움터.

오늘처럼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날이면 그 못은 덩치를 어마어마하게 불렸겠지.

아, 빠져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웃었다. 그 생각이 주는 감상이 고통이나 괴롬이 아닌 까닭이다. 그것은 그냥 농담에도 가까웠다. 심히 자조적인 농이었으니 이렇게 웃는 것이 가능했다. 숙부가 못에라도 빠져 죽었더라면, 아버지는 평생을 못을 가꾸는 데 쓰지 않고 그 못을 메워버렸을 것이다.

아내는 그가 그렇게 말할 때면 엄격한 얼굴을 했다. “여보, 그러면 안 돼요. 우울한 생각은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다니까요. 그럴 땐 주문을 외우는 거예요.”그런데 그 주문이 뭐였지? 그는 눈을 깜빡였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비는 터널 속에서 내리지 않는데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을 깜빡거렸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물이 그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그에게는 닿지 않는 줄 알았던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뭔가 부딪혔다.

그는 차를 멈췄다. 차와 부딪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약간의 충격만 전해졌으니 무언가 연하고 약한 것이 부딪친 것이리라. 그는 멍하니 차를 세우고 앉아 있다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차에서 내렸다. 터널 안에는 오직 그의 차만이 달리고 있었고 그리고 차에 부딪쳐서 멀리 날아 가버린 잔해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차마 그 잔해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렸다.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결정지었다. 누가 이 밤에, 인도라곤 전혀 없는 터널에 뚜벅뚜벅 걸어온단 말인가? 아마 산짐승일 것이다. 다람쥐나, 노루, 개나 고양이 같은 그런 짐승. 아니면 두더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 잔해를 확인해보지 않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는 시동을 켰다. 차는 다시 움직였고, 그는 아주 천천히 운전하면서 잔해를 확인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곳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검은 형체였다. 성인 남성처럼 팔다리가 있고 그것은 기괴하게 꺾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사람처럼 큰 노루나, 아니면 사슴일 것이라는 생각을 애써 하려고 했지만 그는 119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찾았다. 만약 사람을 죽인 것이라면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감옥에 가야할 것이었다. 저 잔해가 사람이라면, 하지만 이 어두운 터널로 이 날씨에 걸어 들어오는 것은 분명 자살 행위와 다름없는데 내가 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지. 사고가 난 건 절대 그의 탓이 아니었다. 자살을 하려면 곱게 떨어져 죽을 것을 왜 하필 터널에 와서! 분명 그에겐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는 단지 터널을 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단지 터널을 달리고 있었을,

빌어먹을. 그는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근처에는 마트도 없었고 그의 차에 있는 것이라곤 껌 종이와 생수 반통, 그리고 휴지 두 개가 다였다. 그는 멍한 얼굴로 터널에서 나와 차를 갓길에 세우고 다시 터널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그는 한참 시체를 찾았다. 시체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는데 벽에 붙어 손으로 계속해서 무엇이 있는지 더듬어봐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만져진 것은 물웅덩이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물이 아니었고 손가락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우산을 들고 내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빗물에 푹 젖어있었는데도 핏물과 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근처를 더듬어보자 소름끼치는 감각이 손가락에 닿았다. 차갑게 식어 경직되어 있는 시체. 사람의 머리털이 손에 닿자 그는 구역질이 났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 버리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일을 해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는 시체의 머리털과 팔을 질질 끌며 터널에서 나왔다. 차마 그 잔해가 무엇인지 자세히 볼 수가 없었으므로 그는 눈을 감고 달리다시피 걸었다. 시체는 무거웠고 질질 끌렸기 때문에 그는 생각한 만큼 빨리 터널에서 나오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된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근처에 누군가 오진 않았을 것이다. 기분이 끔찍했다. 시체를 차에 태우고 멀리 이동해서 묻는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어떻게 시체를 내 차에 태울 수 있지? 그는 한시라도 시체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단지 빨리 이 일을 해결하고 차에 올라타서 떠나 버리고 싶었다.

비가 땅을 무르게 했으나 손으로 땅을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곧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손가락이 아파왔으며 손끝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적당한 구덩이가 생겼을 때, 그는 구덩이에 물이 차기 전에 시체를 그 안에 넣고 흙을 덮고 근처의 나뭇잎들과 돌멩이들을 채워 넣는데 열중했다. 하지만 시체는 생각보다 컸다.

땅은 울퉁불퉁한 것처럼 보였다. 흙을 근처에서 모아오던 그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창백한 얼굴과 마주쳤다. 시체는 눈을 감고 있었고 놀랍게도 아버지와 끔찍하리만치 닮아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아버지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이 년 전 암으로 죽었으니 이 시체는 절대 남자의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시체는 누구란 말인가. 벼락처럼 든 생각은 아버지가 오래 전에 잃어버렸다던 아버지의 어린 동생이었다. 뇌가 타 버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신없이 일어난 그는 차에 올라타 무작정 시동을 켰다. 누군가 그의 귀에다 입을 대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았다. 제기랄, 닥쳐. 그는 어질어질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으나 소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번개와 천둥이 번갈아 치고 있었다. 닥쳐, 닥쳐, 닥쳐. 그는 차를 미친 듯이 몰았다.

그는 아버지에게로 가고 있었다.

아버지에게로.

그만 그러던 중에 아버지의 동생을 차에 치여 죽여 버렸지만.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그는 차를 멈춰 세우고 핸들에 머리를 처박았다. 아버지는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여 못 잊던 동생을 자기 아들이 죽이다니, 누구라도 그런 것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곧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내가 몹시 보고 싶었다. 그녀라면 그에게 다시 괜찮냐고 물어봐 줄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자기 삼촌을 죽인 것을 알면 그 따뜻한 얼굴로 그를 다시 봐 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아내는 매우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괴로워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찾았다. 차 시트 아래에 처박혀 있는 핸드폰을 쥔 그는 119를 누르기 위해 핸드폰을 켰다. 히터를 틀었음에도 그는 몹시 추워 죽어버릴 것 같았다. 온 몸이 심하게 떨려왔고 그는 눈물로 눈앞이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신호음이 아주 천천히 갔다.

“119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여보세요? 좀 더 크게 말씀하세요.”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죽였어요. 차에 쳤어요. 여긴 터널인데, 사람이 들어오면 안 되는데 사람이 들어와서 그만 차에 부딪쳐버렸다고요. 그는 그래선 안 됐어요. 어떡하면 됩니까. 덜컥 무서워서 그를 묻으려고 했지만 그는 너무 컸고, 그래서 저는, 저는…….”

“진정하시고 위치를 말씀해 주십시오. 교통사고가 났단 말씀입니까?”

“전 그래서는 안 됐어요. 그는 제 숙부라고요…….”

천둥이 치는 소리에 그는 깨어났다. 처음에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그랬기 때문에 평안했으나 점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정신이 좀 들어?”

그 생각을 끊은 것은 아내의 목소리였다. 그는 이제껏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이었나 생각했다. 아내의 목소리에는 그런 능력이 있어왔다, 언제나. 그녀는 늘 그의 악몽을 깨우곤 했다. 비록 그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울지라도.

“당신, 하마터면 죽을 뻔 했어. 영양실조는 둘째치고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저체온증에 죽을 뻔 했단 말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내는 화가 난 것 같았다. 그 말에 그는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가 친 것 또한 꿈이 아니고 사실이 된다. 그는 말라서 터진 입술로 겨우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막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했으며 전 남편 일로 병원에 오는 일이 정말이지 달갑지 않다고 덧붙였다.

“아 참. 그리고 터널에는 무슨 일로 갔던 거야? 당신이 말했던 시체는 그 곳에 없었어. 피 웅덩이도 없었고 그냥 짐승이 땅을 파헤친 흔적만 있다고 하던데 당신 차를 몰면서 졸기라도 했던 거야?”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내는 그냥 돌아서버렸고 또각거리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내를 계속 바라보는 대신 자신의 손을 올려 보았다. 손톱이 빠질 정도로 땅을 긁어대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은 그날 차를 타고 나왔을 때와 다름없이 멀쩡했고 생채기 하나 없었다……. [홍예송/국어국문학과]

 

<구멍>

기억나는 그때부터 나는 항상 규칙적이고 반복되는 삶을 살았다. 어딘가에 쫓기거나 숨이 막히게 조이지도 않는 무난한 삶. 그리고 내가 원하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을 때 나는 더 이상 그 직업이 즐겁지 않았고 새로운 무언가가 내 삶에 나타나길 바랐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구멍이 나타났다.

백팩을 소파에 집어던지듯 놓고 그 위에 다리를 올리고 소파에 누웠다. 소파 가죽과 내 청바지가 맞닿으며 뿌드득 소리가 났다.

“하아...”

눈을 감고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 기대도 안했던 회사였는걸. 떨어질 줄 알았어. 담담하게 맘을 먹어보려 했지만 10번째 회사 면접에서 탈락했다고 생각하니 맘이 다시 심란해졌다. 배가 고파서 더 심란하려니 하며 부엌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저녁에 사놓은 우유가 있었다. 물끄러미 그 우유를 보다 손에 쥐었다. 종이팩으로 된 우유 입구를 열려고 했지만 강하게 붙어있는지 열리지가 않았다. 입구에 손가락을 넣어 쑤셔보기도 하고 힘으로 꾹꾹 눌러보기도 했지만 살짝 뜯어진 입구로 우유 한 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흐르기만 했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감정도 없고 힘도 없는 우유팩 종이 따위가 날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곧 우유는 내 손을 떠나 식탁을 건너 싱크대로 떨어졌고 우유팩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우유를 공중으로, 싱크대로, 부엌 바닥으로 뿜어냈다. 비릿한 우우 냄새가 났다. 하얗게 된 싱크대 주변을 바라보니 더 머리가 지끈거렸다. 배고픔도 사라진 것 같아 우유를 그대로 둔 채로 거실로 나와 TV를 켰다.

‘속보입니다.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구멍은 땅이나 하늘이 아닌 허공에 무작위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나는 TV 소리를 더 키웠다.

‘사람들은 이 구멍을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 구멍이 생긴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절대 구멍 주위로 가지 말라는 주의가 있었습니다.’

또 환경오염 때문이겠지. 아마 윗집 여자가 밤마다 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하며 사용한 샴푸 때문이겠지. 그 여자가 밤마다 외출 준비를 하며 사용한 향수만으로도 환경오염이 더 심해졌을지도 몰라. 아마 옆집 남자가 매일 마다 피워대는 담배 때문이겠지. 아랫집 학생이 아침마다 치는 피아노 소리 때문이겠지. 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야.

나는 말도 안 되는 뉴스를 끄고 소파에 누웠다. 씻는 것도 옷을 갈아입는 것도 다 귀찮아졌다. 그냥 이대로 다음날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아침은 왔고 나는 싸구려 가죽냄새를 맡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방이라곤 샤워하기도 힘든 좁은 화장실이 다인 내 방이 눈에 들어왔다. TV는 먼지가 가득 쌓여 검정색이 회색으로 보일 정도였고, 요즘 흔히 보이는 디지털이니 뭐니 와는 거리가 먼 앞뒤가 두꺼운 오래된 TV였다. 부엌은 싱크대와 작은 냉장고가 들어섰을 뿐인데 답답할 정도로 작았다. 거실은 소파하나가 자리를 몽땅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베란다로 다가가 누런 커튼을 열었고, 내가 좁고 숨 막히는 이 방을 선택한 이유가 보였다. 내 방은 경치하나는 죽여줬다. 강 하나를 두고 이 작은 건물과 높고 으리으리한 아파트가 마주보고 있었다. 저기 사는 사람들은 아침에 뭘 할까. 살짝 구운 식빵에 버터와 잼을 바르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아이들은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시험 점수와 갖고 싶은 물건을 이야기 하며 엄마와 협상하고 있겠지. 나는 아파트에서 눈을 돌려 아파트 주차장을 보았다. 온갖 외제차들이 가득했다. 저걸 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양복을 입고 왁스로 머리에 힘을 잔뜩 주고 차를 타는 순간까지 손에 핸드폰을 놓지 못하며 일을 하는 사람들일까.

그렇게 한참을 아파트 주차장을 보고 있는데 뭔가 눈에 들어왔다. 불규칙한 타원형에 오로라처럼 흔들거리는 검은 물체였다. 하얀 종이에 먹물이 퍼지듯 검은 물체가 콩알만 했다가 옆에 세워진 차만큼 커졌다. 그때 어떤 남자가 아파트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물체를 보았는지 가까이 다가갔다. 그 남자는 조금 멀리 서서 바라보더니 갑자기 그 물체를 향해 뛰어갔다. 물체와 충돌하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는 그 물체와 충돌했다. 아니, 충돌이 아니라 흡수되었다. 아니, 빨려 들어갔다...? 나는 베란다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저게 뭐야. 순간 어제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 남자가 사라진 후 얼마 안 되어 그 물체를 발견한 듯 경찰들이 도착했다. 그 남자는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열쇠를 챙기고 그 아파트로 달려갔다.

아파트의 입구는 구경하러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 사이를 헤치고 그 물체로 가까이 접근하려 했다.

“안됩니다. 더 이상 다가오시면 안 됩니다.”

완전 무장한 경찰이 내 앞을 막아섰다.

“사람이 저기로 빨려 들어갔어요. 내가 봤어요. 그 사람을 구해야 해요.”

경찰은 눈이 커지더니 어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그 사람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그걸 들은 그 사람이 내 앞에 섰다. 책임자인 듯 했다.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이 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고요?”

“네. 제가 봤어요.”

“저희가 왔을 땐 이걸 처음 발견한 이 아파트의 경비만 이 주위에 있었습니다.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분명 제가 봤어요. 저기, 저기 보이죠? 저기 작은 건물이요.”

나는 손가락을 들어 내가 사는 건물을 가리켰다. 그 사람은 내 손가락을 따라 그 건물을 힐끗 보더니 미간에 주름을 살짝 지었다.

“저기서 이 아파트를 훔쳐 본겁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훔쳐 본 게 아니라 보인 거예요. 그러다 그 사람을 봤구요.”

그 남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뉴스를 타고 싶어 하는 맘을 알겠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간 연행될 수 있어요.”

말도 안 된다니?

“이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뇨? 그럼 제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거예요? 제가 분명 봤다구요”

“당연하죠.”

“뭐요?”

그 사람은 지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사람을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자자! 다들 이제 집으로 들어가세요. 저희들이 왔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시고 집으로 들어가세요!”

그 사람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자 다시 나에게 왔다.

“당신이 하는 말이 왜 거짓말인지 알려주죠.”

그러더니 바리케이트 앞에서 돌 맹이 하나를 주웠다. 그리고 그 물체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돌 맹이를 던졌다. 그 돌 맹이는 그 물체에 막이라고 씌워진 듯 뭔가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보이나요?”

나는 땅에 떨어진 돌 맹이를 보았다.

“저 구멍은 뭔가로 막혀있어요. 아직 사람이 직접 부딪혀 보거나 한 적은 없지만 분명 뭔가로 막혀있단 말입니다.”

나는 시선을 그 사람에게로 옮겼다. 그 사람은 내가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 보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사람이..”

“저런 집에 살면 분명 몸에 문제가 생겨도 심하게 생길 것 같군요.”

“....뭐라구요?”

그 남자는 내가 살고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가에 흐릿한 야유의 미소를 띠우며 나에게 말했다.

“아직 젊어 보이는 아가씨인데 왜 저런 곳에 혼자 살고 있죠?"

“전 혼자 산다고 한적 없어요.”

“오.. 그럼 더욱 문제네요. 딱 봐도 낡고 좁은 건물에 누군가와 함께 지낸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안 생기는 게 이상하겠네요.”

“이..이봐요!! 무슨 말을..!!!”

나는 그 사람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은 얼굴에 표정을 지우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내 말을 잘랐다.

“아까 한말 못 들었어요? 집으로 돌아가세요! 아님 정신병원이나 요양원으로 가서 치료를 좀 받든가.”

나는 이 재수 없는 사람의 뺨을 갈기고 싶었다. 그리고 목 깊은 곳에서 엄청난 분노와 함께 고함이 나오려는 순간 이 사람은 등을 돌리며 나에게 말했다. 아주 감정 없고 냉정한 목소리로.

“더 이상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 공무집행 방해로 연행할 겁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고 문 옆에 걸려있는 달력이 바람에 크게 흔들렸다. 그 싸가지 없는 말투와 모습이 자꾸 생각났고 욕이라도 하고 올 걸하고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어제 던진 우유가 보였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런 집에 살면 분명 몸에 문제가 생겨도 심하게 생길 것 같군요.’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다시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사람의 차가운 눈빛과 목소리가 계속해서 보이고 들리는 듯 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벽 귀퉁이에 기댔고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제껏 혼자 잘 해왔다.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으로 혼자 남아도 학창시절동안 친구가 없어도 잘해왔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진 못했어도 원하는 과에 입학해 공부했고 눈에 띄게 좋은 성적은 받지 못했지만 무난히 졸업했다. 매달 엄마가 보내주던 돈이 더 이상 오지 않았을 때도 나는 괜찮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잘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지는 이 생활과 매번 떨어지는 면접이 계속해서 짓누르고 있었다. 내 몸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이렇게 큰 소리로 울어본 적이 언제였을까. 내가 태어나는 순간에도 나는 이렇게 울진 않았을 거 같다. 그 사람의 말이 다시 내 귀에 들리는 듯 했고 정말 내가 정신병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운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눈물의 소금기 때문인지 눈가와 볼이 따끔거렸다. 나는 베란다로 시선을 돌렸다. 베란다를 통해 보이는 아파트가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보는 것이 항상 즐거웠던 곳이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커튼을 홱 닫았다. 어둑어둑해 진건지 커튼을 닫은 내 방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불을 키려고 버튼을 향해 가다가 멈추었다. 내 방도 보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소파로 힘없이 쓰러졌고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우유로 얼룩진 부엌을 치우고 얼마 남지 않은 통장 잔고를 확인한 뒤 집 앞 마트로 향했다. 제일 싼 식빵과 우유를 사서 마트를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가려는 찰나, 다시 내 눈앞에 강 건너 아파트가 보였다. 그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그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 검은 구멍이 다시 보고 싶었다. 나는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니 어제 보았던 그 구멍이 보였다.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보기 싫은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어제 그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조금 달라보였다. 편한 차림에 아파트 주민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저 사람은 이 아파트 주민이었다. 그 사람도 나를 보았는지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여길 다시 왔죠? 만날 사람이라도 있는 가요?”

“내가 여길 오든 말든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네요.”

그 사람은 감정 없이 나를 바라보다 구멍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저 구멍에 저 사람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당장 달려가 밀어 넣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꽉 채웠다.

“이 구멍은 어디서 온 걸까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요.”

“하!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길 원하는 것 같이 말하시네요.”

나는 괜히 꼬투리를 잡았다. 그 사람은 나를 향해 몸을 돌려서 나를 보았다. 표정 하나 없는 얼굴이 살짝 풀리는 듯 했으나 이내 표정이 사라졌다.

“항상 새로운 것과 가십거리를 만들고 싶게 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으니까요.”

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남자는 다시 구멍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생겼어요.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간이 있을 거 같아요.”

“당신을 위한 공간이라면 이 넓은 아파트로 충분하지 않나요? 여기에 살 정도의 재력이라면 집을 하나 더 장만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집을 하나 더 사는 건 어때요? 함께 사는 부인이 바가지라도 긁나보죠?”

나는 비웃음이 섞인 표정으로 비꼬아 말했다. 그 남자는 구멍에 시선을 꽂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고 괜히 머쓱해진 나는 발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커튼을 열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환기를 시킬 마음으로 활짝 열었으나 옆집 남자가 피워대는 담배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닫았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중고 시장에서 싸게 구입한 두꺼운 노트북이 끽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약한 와이파이를 노트북에 연결했고 나는 취업을 위해 여러 기업에 이력서를 보냈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기업들에도 헛된 희망을 가지며 이력서를 넣었다. 보나마나 탈락하겠지만. 노트북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까 사온 식빵을 구웠다. 낡은 후라이팬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불을 켰다. 다행히 아직까진 가스가 끊기지 않은 것 같았다. 식빵을 얹고 바삭해 지길 기다렸다. 빵이 익는 동안 아파트에서 보았던 구멍 생각이 자꾸 났다. 그 구멍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을까.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정말 구멍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시커먼 물체를 그 사람은 자신만을 위한 공간이 있을 것만 같다고 했다. 정말 그런 공간이 있다면.. 나만을 위한 곳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러나 그 생각은 시커멓게 탄 빵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그 날 새벽, 나는 갑작스런 더움에 잠에서 깼다. 밖은 해가 뜨고 있는지 푸르스름했다. 커튼을 열고 문을 살짝 열었다. 바람이 살짝 들어오면서 새벽 냄새가 났다. 내 방 전체가 푸르스름한 새벽이 가득 찬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차가움이 느껴져 살짝 옷을 여미고 베란다로 나갔다. 새벽 속에 있는 아파트가 보였고, 그 구멍이 보였다. 새벽이라 그런지 더 시커멓게 보였다. 구멍 주변엔 여전히 바리케이트가 쳐져있었고 주변에 경찰들과 사람들은 없었다. 나는 신발을 신고 다시 아파트로 갔다.

구멍은 새벽이라 그런지 어제보다 더 커진 느낌이었다. 나는 바리케이트 근처로 다가갔다. 순간 바람이 불었고 나는 그 바람이 저 구멍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다가가려는 순간 인기척이 들렸다. 저 멀리서 어제 보았던 그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구멍에서 떨어져 주변 나무에 숨었다. 나를 보면 분명 한소리를 할 것이 분명하다. 정신이 어쩌니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떠니 하며 나를 또 상처 줄 말만 하겠지. 나는 살짝 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그 사람이 가길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구멍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고, 인상을 찌푸리며 어떻게 이 아파트에서 빠져나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또 다시 그 구멍이 사람을 삼키는 것을 보아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구멍 속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 혼자만이 그 광경을 봤다는 것이 더 무서움을 안겨주었다. 마치 내가 그 사람을 그 곳으로 밀어 넣은 것 같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고, 겨우 한 발짝을 움직였을 때는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자 나는 주변에 누가 있는지 어떤 것이 지나갔는지 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미친 듯이 달렸다. 그 사람은 왜 그곳으로 들어갔을까.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이 가진 사람이었다. 좋은 직업에 좋은 집, 좋은 옷을 입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구멍에 대해선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지 않았고, 내 말 역시 믿지 않았다. 나에게 막말을 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었지만 어쩌면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죽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왜? 아님, 정말 자신의 공간이 있다고 믿었던 걸까? 무슨 생각이든 맞지 않았다. 그 사람의 모습과 하나도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뛸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비로소 발을 멈추었다. 아파트는 물론 우리 집과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내 눈앞에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등교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내가 아까 본 그 곳의 상황과는 반대로 너무 평화로운 곳이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시끄럽게 종알대며 지나갔고 몇몇 차들은 그런 학생들을 향해 경적을 울려댔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그 모습을 보았다. 대체 이 곳은 어딜까. 내가 아까 본 것은 뭘까. 엄청난 괴리감이 나를 눌렀다. 나는 그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등을 돌려 힘없이 우리 집을 향했다. 계속 그 사람이 떠올랐다. 어쩌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다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뭔지 알 수 없는 구멍으로 직접 들어갔다. 무엇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무서웠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아파트에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집 오자마자 나는 아파트를 커튼으로 가렸다. 누구한테 말해야 하지?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것보다 그 사람의 가족들은 알고 있을까? 가족들은 있을까? 머릿속에 답 없는 질문들이 계속 떠올랐다. 나는 계속 불안해졌고 이상한 한기가 느껴져 소파에 앉아 몸을 더 웅크렸다. 일단 신고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나를 방관자로 몰아간다면? 어쩌면 그 사람이 그 구멍으로 들어가는 걸 내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한 사람의 죽음을 방관한 사람이 되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거품처럼 부풀었다. 그 때 방 안에 있던 전화벨이 울렸고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소파에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힘을 줬다. 그리고 곧 소파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들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축하드립니다. 00기업에 최종합격하셨습니다!’

나는 무서운 말이라도 들은 듯 수화기를 빠르게 놓았다.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기쁨에서 나온 떨림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뒷목을 이어 척추까지 칼로 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눈앞에는, 아파트에서 봤던 그 물체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 물체는 잉크가 번지듯 내 눈앞까지 왔고 그 구멍에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딱딱 짜여진 생활. 감정없이 움직이는 나의 모습. 그걸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돈을 더 벌수록 몸이 더 편해질수록 돈을 마음껏 쓸수록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더 이상 의미 있는 인간이 아니구나. 나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기엔 나는 너무 비었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구멍은 아파트 단지에 생겼고 나는 결심을 했다. 내 시계를 멈춰버리기로. 제일 아프지 않게 하지만 제일 의미있게. [김소연/국어국문학과]

 

<침상>

눈을 뜨기 전부터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껏 해온 노력들이 헛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젠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결단의 용기였을까.

아니면 슬픈 체념이었을까.

희망 병원이라 불리는 병원에는 특별한 병을 가진 환자가 입원해 있다. 그리고 그 환자는 지금 이 병실에 죽은 듯이 누워있다. 제법 큰 병실 속에 홀로 누워있는 그의 얼굴은 평화롭고, 눈은 무겁게 감겨 있다. 그의 규칙적인 호흡 소리를 듣는다면 분명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지만, 미동조차 없는 그의 모습은 흡사 방금 전에 세상을 뜬 망자의 모습 같았다. 한동안 그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저 계속, 끝없이 계속 자고만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고, 유일한 소음은 병실 밖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뿐이었다. 마치 그를 둘러싼 세상이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지금껏 항상 똑같았던 상황은 지금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그의 눈꺼풀이 서서히, 이른 아침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처럼 느린 속도로 열리기 시작했다. 짧지 않은 시간 끝에, 마침내 그가 다시 깨어났다.

이번에는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걸까. 그가 일어나자마자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의 머릿속, 그의 시야 너머에는 아직 희뿌연 안개가 끼여 있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항상 그의 병실에 가득 끼이는 안개였다. 그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약 5분 정도가 지나자 그제야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시야가 완전히 돌아오자마자 그는 침대 왼편의 벽걸이 디지털시계를 쳐다보았다. 1시 33분. 창문에 쳐진 커튼 사이로 일렁이는 햇빛으로 보아 지금은 분명 오후일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는 최소한 7시간 이상 잠이 든 셈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잠든 시간은 2월 4일, 오전 1시에서 2시 사이쯤이었으니까. 그는 그 시간까지도 잠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잠든 시간은 결코 그 정도로 짧을 리가 없었고, 그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누운 채 말없이 침대 오른편의 서랍에 놓여 있는 탁상용 달력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는 시계와 달리 달력은 보는 것만으로는 날짜를 확인해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을 냈고, 동시에 달력 날짜를 제때 표시해두지 않은 간호사들에게 짜증을 냈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는 선 채로 기지개를 켰다. 그가 생각 없이 벌인 경솔한 행동은 곧바로 그에게 전해진 육체적인 충격으로 귀결되었다.

온 몸이 미칠 듯이 저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여느 일반인들이 하룻밤 동안의 수면 뒤에 기지개를 펴면서 잠시 느끼는 약간 괴로우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이 아닌, 전신을 관통하는 전기와도 같은 고통이었다. 흡사 몸의 모든 근육에 철심을 박아 넣고, 모든 혈관에 모래를 부어넣은 것 같은 뻣뻣함과 고통이 신경계를 타고 올라와 뇌에 전율을 일으켰다. 그는 핑 도는 머리 때문에 잠시 휘청거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위가 저릴 듯이 닥쳐온 끔찍한 공복이 복부를 저릿하게 옥죄오며 그에게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는 휘청거리다 침대 옆의 흰색 서랍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밥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것은 그의 왼 손등에 꽂힌 링거뿐이었다.

잠에서 깨는 날이면 언제나 밟는 수순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기분 더러운 절차란 말이지, 빌어먹을. 그는 중얼거렸다.

괴로움에 비틀거리며 병실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밀어젖힌 그는 나오자마자 또다시 오만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야 자신이 이 병원에 염증이 나도록 오랜 시간 입원해 있었다는 사실과, 이 병원에 염증이 난 가장 큰 이유가 동시에 기억났다.

모든 벽이 하얗다. 병실 안의 벽도, 화장실의 벽도, 병원 복도의 벽도, 심지어 흡연실 벽까지 모든 벽이 하얗고 하얗기 그지없다. 벽과 천장, 바닥을 구분 지을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흰색의 미세한 명암의 차이밖에 없었다. 이 병원의 인테리어 담당 녀석은 모든 벽을 깨끗이 완전무결한 흰빛으로 도배해 놓으면 우리 같은 환자분들께서 어지간히도 좋아하실 줄 알았나 보다. 차라리 벽의 아래쪽 절반만이라도 초록색 페인트로 색을 입혀주었더라면 이렇게 벽마저 징글맞게 느껴지진 않았을 텐데.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바로 옆을 지나치는 간호사의 흰 간호복,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흰 벽,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보일 흰 침대시트, 그 옆에는 흰 서랍, 저 멀리서 걸어가는 의사들의 흰 가운, 고개를 위로 올리면 흰 천장…….

여긴 언덕 위의 하얀 집이 아니야. 이 미치광이들아.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그는 갑자기 욕망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도 뻐근한 이 몸뚱이가 빨리 편해지기를, 맛있는 음식들을 위가 저릴 때까지 입에 쑤셔 넣게 되기를, 조금이라도 좋으니 흰색 말고 다른 색이 섞인 풍경을 감상하기를 바랐다. 잔다는 것은 이제 그에겐 끔찍하리만치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병실에서 나온 뒤 오른쪽으로 걸었고, 잠시 후 나온 갈림길에서 이번에는 왼쪽으로 갔다. 그러자 그 층의 중앙 홀이 나타났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이윽고 달력을 찾았고, 지금이 몇 월인지 확인해보았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3월 16일 일요일. 그것이 오늘의 날짜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일까. 그는 계산했다.

2월 4일에서 3월 16일까지…… 그렇다면 대략 사십일 하고도 반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시간은…… 약 972시간. 그는 아찔해졌다. 수면 시간이 훨씬 더 증가한 것이다. 지난번의 수면 시간이 약 460시간이었으니, 거의 두 배 이상 증가한 셈이었다. 그는 망연히 달력 앞에 서 그 말도 안 되는 숫자들만 뚫어져라 쳐다봤고,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다른 환자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힐끗힐끗 쳐다볼 즘에는 이미 수십 분이 지나간 뒤였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수십 가지의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회피, 부정, 자기회의, 고통으로 그의 정신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그는 나가고 싶어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 승강기로 향했다.

승강기 안에 들어간 그는 1층을 누른 뒤 벽에 힘없이 기대었다. 그러다 문득 옆에서 자신과 비슷한 동작을 취한 사람을 본 듯한 느낌이 들어 옆을 돌아보았다.

거울이었다. 거울 속의 그는 승강기 속의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의 뒤에서는 수십 명의 또 다른 그가 나란히 대치한 채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맞거울의 연쇄였다.

그가 몸을 약간 숙이자, 다른 그들도 일제히 몸을 숙였다. 몸을 다시 펴자 그들도 몸을 폈다. 그러나 그는 그 모습들이 지금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저 모습들이 지난 사십일 동안 자신이 잃어버린 자기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그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순간, 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슬픔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런 절망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승강기가 1층에 도착했다. 그가 회전문을 지나 병원 밖으로 빠져나오자 그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장렬하게 그를 비추는 햇살이었고, 그 눈부심에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병원의 옥상 위에 매달린 간판이 보였다.

희망 병원이라. 희망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누군가에겐 그 작명이 대단히 어색해 보일 수도 있겠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굳이 그 누군가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만 더 비참해질 뿐일 테니.

 

병원 밖에 나서자 한적한 공원이 그를 반겼다. 그는 이 지긋지긋한 병원 안에서 그나마 이 장소를 가장 좋아했다. 일단 주변의 식물들 덕분에 공기가 상쾌했고, 적어도 이곳에 있는 순간만큼은 그 귀찮은 의사들이 자신을 내버려 두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징그러운 흰색에서 해방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풀잎의 초록색, 흙의 붉은 갈색, 꽃의 각양각색, 그리고 하늘의 엷은 푸른색. 모두 병에 걸리기 전에는 감사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소중한 아름다움들이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소중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까. 이 병에 걸리기 이전까지는 그 또한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한 명의 가장이었을 뿐이다. 그는 어느새 그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혹한기의 날카로운 바람이 건물 안으로 물밀듯이 불어 닥쳤다. 그의 눈에 몇몇 사람이 부르르 몸을 떠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기 전에 재빨리 문을 닫았다. 카페의 내부는 따뜻하고 세련된 느낌이 났다. 건물 내벽은 연갈색 벽돌이 그려진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고, 유리로 된 외벽 주위에는 원형 탁자들이 줄지어져있었다. 각 탁자에 놓인 등받이가 둥근 섬세한 디자인 의자들, 천장에 매달린 채 은은한 연주황색 빛을 내비치는 꽃 모양의 조명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시선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 가장 먼저 바라본 것이 그녀의 모습이었기에. 지금 그는 그녀의 앞에 앉아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그러지 못한 채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뭔가 망설여지거나 충격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 몸이 굳어버리는 버릇은 병에 걸리기 전부터 그가 가지고 있던 질 나쁜 버릇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스푼으로 커피를 휘젓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는 1년 전 그가 결혼기념일 때 선물했던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오른손 약지에는 8년 전 그가 프러포즈를 할 때 바쳤던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와 같은 것이었다.

문득 그녀는 문을 돌아보았고, 그제야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그녀 특유의 무감정한 시선에 익숙해져 있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의 눈에 담긴 슬픔과 불안함을 읽을 수 있었기에.

그녀는 아직도 망연히 서 있는 그를 무심히 바라보다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고는 문자를 입력했다. 이윽고 그의 휴대전화에 그녀의 문자가 날아왔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몇 초 후, ‘난 괜찮아.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일게.’

다시 몇 초 후, ‘여기 와서 앉아.’

그는 그녀의 말에 따랐다. 그녀의 앞에 앉은 그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를 감정에 휩싸인 채 침묵하고 있었다.

신경과에서 수많은 검진을 받은 뒤, 그는 오늘 그 최종 진단을 받고 온 길이다. 그 결과는, 그에게 잠의 감옥 속에서 평생을 썩으라는 종신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 결과는 사형 선고라고 불리는 불치병 진단보다 훨씬 더 비참한 것이었다. 그런 결과를 그는 차마 그녀에게 밝히기가 어려웠다.

“……오늘은 날씨가 참 춥네, 그렇지?”

“…….”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는 걸 포기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말을 돌리는 걸 싫어했다. 항상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그녀의 성격은 그와는 참 달랐지만, 그는 그녀의 그런 면이 평소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 기분을 이해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결과가 나왔어.” 그는 본론을 이야기했다.

“……말해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증상은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야. 이 병은 앞으로도 계속 심화될 거래. 지금은 그래도 반나절 정도이지만, 앞으로 수면 시간이 계속 늘어난다면, 결국은…… 며칠이고, 몇 개월이고 잠만 자는 산송장으로 변해버리겠지.” 진실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럼 치료법은?” 그녀가 몸을 앞으로 당기며 물었다.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질문을 한 이상, 그는 그 말에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선 고칠 수가 없다고 해.”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고칠 수 없다고?”

“고칠 수 없다는 게 아니야. 내 말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내 병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만 한다면, 그땐, 그땐 희망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 있잖아? 내 병을 연구하기로 한 사람들은 의학계에서도 베테랑들이래. 그런 사람들이 내 병을 연구한다고 하니, 뭔가 금방 해결될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아? 하, 하하. 하…….” 그는 이내 침묵했다. 그 자신조차 자신이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와 그녀는 침묵에 잠겼다. 한참 만에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 회사는 그만둬야 할 테고, 병에 대해 연구하는 동안에는 당분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겠지.”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저 커피잔을 쥔 두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두 손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까…… 병원비에 대해서는 그분들이 해결해 주신다고 하니 한시름 놓았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 회사를 그만두면 당신 생활비랑, 우리 애 학비는…….”

“지금, 지금 내가 돈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 줄 알아?” 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의 몇몇 사람이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볼 정도로.

그는 침묵했다. 그녀의 의외의 모습에,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그는 앞으로 절대로 그녀의 이 표정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눈물이 맺힌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이런 식이라면 더더욱. 이런 상황은…… 정말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돼는 어이없는 이야기야. 이런 식으로…… 당신과 끝나고 싶진 않았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는 침묵했다. 동시에 그녀를 배려해준답시고 자신이 한 말을 저주했다.

그녀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는 잠시 산책길을 걷다가 벤치에 앉고는, 그자세로 눈을 감은 채 한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누가 보면 잠든 것 같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깨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지금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와 그녀에 대한 생각이었다.

문득 눈을 뜬 그의 옆에는 언제부턴가 한 명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 또한 환자복을 입고 있는 환자였다. 노인은 이따금씩 괴롭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이나 다리를 주무르곤 했다. 무슨 병에 걸린 것일까. 그는 약간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 속에서 공존하고 있었지만, 노인이 먼저 그 침묵을 깼다.

“좋은 날씨군, 그렇지 않은가?” 노인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노인의 친절해 보이는 얼굴을 보자 이내 경계심을 풀고는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네. 항상 오늘 같았으면 좋겠군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이게 봄 날씨라고는 전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었잖은가. 정말이지 요즘은 봄이 봄 같지가 않아. 3월이 다 끝나 가는데도 날씨가 이 모양이라니, 원.”

노인의 말을 들어보니 며칠 전까지는 오늘과는 달리 무척이나 날씨가 추웠던 모양이다. 내가 그날 깨어났었더라면 기분이 더 우울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을 나에게 주어진 약간의 행운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정말 그렇군요. 이런 날씨라면, 이렇게 밖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 즐거운데 말입니다.” 어쨌든 그는 노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휴일에다 이런 날씨라면 어르신의 가족분들이 찾아오실 법도 한데, 오늘 문병을 오신 분은 없으신가요?”

“허허, 말도 말게. 요샌 가족들도 잘 찾아오질 않아. 예전엔 그렇게나 호들갑을 떨면서, 나보다도 더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모습이 참 우습고 딱하기도 하더니만, 그러던 녀석들이 이젠 나란 놈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렸나 보네. 하긴, 나라도 그럴 걸세. 병수발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일 년도 넘게 끙끙대며 괴로워하는 노인네를 어디 감당할 수 있겠나?” 노인은 끌끌대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노인이 하는 말 속에 담긴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과 멀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죠. 그건 어떤 슬픔과도 비교하기 힘들 겁니다.”

“허허, 자네가 내 슬픔을 이해해준다니, 자네도 그 슬픔을 안단 말인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저주스러운 병에 걸린 이후,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아내와 딸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노인은 그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는 말했다.

“뭐, 자네가 나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면 그에 대해 더 캐묻진 않겠네만, 그런 일들에 대해선 하루빨리 털어내는 게 자네에게 좋을 걸세. 나도 한동안은 내 가족에 대해 많이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아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려 노력해 보니, 그 다음부터는 이런 조용한 생활도 썩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노인의 말은 유쾌했다. 노인은 자신의 처지가 불행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듯했지만, 그 말에 미련이나 후회는 없었다. 그 모습에서 그는 뭔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끼며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께선, 지난날의 인생에서 후회를 해보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자네가 그 질문을 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만, 그렇다네.”

“그렇다면…… 어르신께선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노인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나이 먹도록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느낀 삶의 교훈 아닌 교훈이 있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하지만, 그걸 정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의 몫이라는 걸세. 누군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해줄 순 있겠지. 그리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인생을 정할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말일세, 그 삶은 그때부터 자신의 삶이 아닌 남의 삶이 되는 것일세.”

그의 질문과는 많이 동떨어진 대답이었지만, 그는 그 대답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명확하지 않았기에, 그는 계속해서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처지를 되는 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병 때문에 제 삶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뒤로 저는 누군가를 위해서 살 수도 없고, 이 병원에서 나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들은 지금 제 곁에 없고,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의 저를 부정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저는 이제 제 삶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요?” 그는 말하는 도중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노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연륜이 묻어나오는 엷은 미소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노인이 다시 말은 꺼내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넨 지금 자네의 처지 때문에 자네의 과거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먼. 그리고 그 때문에 어떻게든 그 안에서 무언가 가치를 찾고 싶을 테고, 그렇지?”

“……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찾으려고 할수록 계속 자기 골치만 썩일 뿐이야.”

“……네?”

“지금껏 어떤 일들을 해왔는가, 어떤 슬픔을 겪었고, 어떤 행복을 누렸는가 하는 자질구레한 과거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세. 자네가 앞으로 계속 살아갈 예정이라면,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고, 그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해서 앞으로 어떤 삶을 그려나갈 것인가. 그런 걸 고민하는 것이 그나마 제일 나은 게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그 과거의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깨닫기 위해서이지, 과거에 대한 미련과 향수 따위는, 그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한 낭비일 뿐이야……. 난 그걸 뒤늦게야 깨달았다네. 과거의 실수와 과오만을 바로잡으려고 인생을 날리다보니, 어느 샌가 내 주변에는 옛날의 찌꺼기들만이 남아있더군.”

그는 노인의 말에 충격을 받은 채 멍하니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주게나. 자네가 옛날의 나처럼 헛된 것에 목매는 사람 같아보여서 하는 말일세. 어리석은 미련과 후회를 버리지 못해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는 사람은, 나 같은 노인네만으로도 충분하니 말일세…….”

이윽고 노인은 자리를 털고 유유히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는 멀어져가는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노인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내게 지금껏 어떤 일이 있어왔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벤치 위에 몸을 얹은 채 잠들기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인 현재의 나 자신일 뿐이니까. 현재의 나, 너무나도 오래 자는 나, 가족들과 이별한 나……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던가.

쉴 새 없이 자게 된다는 병은 그 날 난생 처음 들어보았지만, 그 뒤로는 질리도록 들어야 했다. 그 병명이 뭐라고 했었던가? 빌어먹을, 지나친 잠은 기억력까지 서서히 퇴행시키는 모양이다.

그날, 의사는 잘 외워지지도 않는 병명을 나에게 주절댔다. 그리곤 그 병이 ‘희귀병’이라는 근사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아주 드문 병이기 때문에, 현재 나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만 수십 번 씩, 문장 배열만 조금씩 바꾼 채 은유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모두 기억난다. 기억날 수밖에.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땐 반나절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꽤나 긴 수면이었지만, 그 잠이 지금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날 줄 알았더라면 그때 뭔가 하나라도 더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렇게 후회해봤자 남아있는 건 지금 이 꼴로 살아가는 나밖에 없겠지.

아내는 내가 보내주었다. 내가 그 빌어먹을 병을 진단받고 난 뒤, 난 더 이상 내가 그녀 곁에 있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떠났다. 오래 전에 딸아이와 함께 떠나버렸다. 그녀는 날 떠나길 원치 않는다고 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렸다. 난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며, 나 같은 놈을 붙잡으며 서로의 인생을 거덜 낼 바엔 차라리 내가 지금 당장 죽어버리겠다며 그녀에게 날 떠나라고 윽박질렀다. 그날 그녀가 흐느끼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다 할 수 없는 일이지. 이런 내가 어떻게 그녀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 난 그녀에게 그렇게나 모질게 대해야 했을까.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온다.

최소한 그들이 내 병원비로 고통 받진 않으리라는 사실에 그나마 감사해야할 것이다. 내 병원비는 연구비라는 명목으로 고스란히 모두 정부에서 지원되고 있으니까. 난 희귀병 중의 희귀병에 걸린 사람이고, 내 병에 대한 연구가 이 나라의 의학계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런 일에 투자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투자로 보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희귀병은 발병한 뒤 수년 내에 자연적으로 완치된다고 하나, 나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내 병은 증상이 호전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악화에 악화만을 거듭해갔다. 결국 몇 개월도 더 지나지 않아 난 한 번 잠에 빠져들 때마다 일주일 이상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내가 이렇게 특이한 현상을 보이자, 수도권의 몇몇 의사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내 병을 연구하길 바랐다. 내 병원비는 모두 그들의 연구비용의 일부로 정부가 지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 그게 정말 다행일까? 그들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병에 대한 해답을 풀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돼버렸군.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하지만…….

이 하루는 또 얼마나 빨리 흐르려나.

“○○씨! 왜 이제야 오신 거예요! 저희가 얼마나 환자분을 찾았는지 아세요? 잠에서 깨어나시면 바로 저희 진료실로 오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환자분께서 이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하시면 환자분의 병이 언제 나으시겠어요!”

거 참 요란하시네요. 계속 공원에만 있었는데도 날 찾지 못한 당신네들의 어수룩함을 욕하세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그에게 역정을 내는 간호사에게 그가 들리지 않게 중얼거린 말이었다.

저기 서 있는 내 담당 간호사는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뒤 꽤나 진땀을 흘렸을 것이다. 날 계속 주시하지 않은 그녀 탓도 있겠지만, 저 간호사가 그런 곤란한 상황을 겪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난 한순간 그녀에 대한 동정심과 미안함을 느낄 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나에게 득달같이 달려드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런 마음이 만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진료실로 가면 의사들은 날 이리저리 살펴보며 온갖 이상한 기계 속에 넣어볼 것이다. 내 머리에 전극을 꽂고, 온갖 질문을 해대고, 수많은 테스트를 끝마친 뒤에는 날 헬스 트레이너에게 보내 스트레칭을 시키면서 ‘늘어져있던 몸을 풀어줘야 한다.’ 따위의 소리를 듣게 만들겠지.

모두 이전부터 수십 번씩 겪어온 일상이니 딱히 별 감흥은 없다. 남들이 언제나 똑같은 하루 일과를 보내며 느끼는, 그런 무미건조한 감정과 별다름이 없을 것이다.

다만, 오늘은 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잠깐이나마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뿐.

문득 그 노인의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자네가 앞으로 계속 살아갈 예정이라면,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고, 그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해서 앞으로 어떤 삶을 그려나갈 것인가. 그런 걸 고민하는 것이 그나마 제일 나은 게지.”

 

……이 반 토막 난 인생에서도 무언가를 바랄 수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서도, 그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을까.

 

시간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 한해서 순식간에 흘러가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오늘의 해가 붉게 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는 노인과 만난 그날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주린 배를 채우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연구진들에게 불려가 뇌파를 검사하는 일상. 그것에서 남는 것은 없었다. 그의 하루의 마지막은 언제나 공허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런 것들에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다시 흰 복도로 돌아왔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과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건넸고, 이따금씩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흰 간호복의 간호사들에게도 어색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그는, 놀랍게도 곧바로 흰 침대에 몸을 눕혔다. 어찌된 일인지 그는 이제 이 순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 서랍장 위에 놓여있는 일기장을 보았다.

그는 얼마 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해야 가장 보람차게 소비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였지만, 일기를 쓰게 된 이후 그는 일기 속에 자신의 일과 말고도 자신의 삶에 대한 고찰,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앞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등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건 그에게 일어난 커다란 변화 중 하나였다. 일기장은 점점 그 분량이 늘어났고, 그는 그 사실에 뿌듯해했다.

지금은 그만뒀지만, 그는 예전부터 잠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커피를 몇 십 잔씩 들이키고, 카페인 함량이 어마어마한 에너지 드링크를 탄산음료처럼 퍼마시는 등 잠과의 치열한 사투를 벌여왔다. 그는 그런 노력을 통해 꼬박 하루를 더 버티는 데 성공한 적도 있었지만, 항상 한순간의 방심으로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불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눕는 것이 두려웠다. 잠은 그의 인생을 갉아먹는 해충이었고, 침대는 그 해충의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보금자리에 태연히 누워 있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그의 생각이 변한 것인지는 그 자신조차도 깨달을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지금 단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고 싶다는 생각. 지금 당장 무한한 의식의 나락으로 가라앉아 모든 것을 잊고 싶다는 생각. 몇 달이 걸리건, 몇 년이 걸리건 상관없으니 이 기나긴 수면을 꿈조차 꾸지 않으며 흘려보내기를 바라는 생각. 어느새 그는 잠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불친절하다. 그가 잠을 원할수록, 그의 정신은 더욱 선명해졌다. 결국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침대 오른편에 있는 창문에 다가가 창틀 위에 몸을 기댔다. 그는 창문 밖으로 벌써 어두워진 저녁 하늘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비행기 한 대가 불빛을 내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의 가족을 떠나보내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로 붐비는 버스터미널 안에서, 그의 아내는 연한 갈색 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렸었고, 그와 그녀 사이의 딸은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불안한 눈으로 자신의 부모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헤어짐의 말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내와 딸에게 잘 가라는 말만 남겼고, 아내는 그에게 미안하다고, 그리고 당신이 괜찮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그때 그녀가 한 말이 진심임을 알지만, 그 말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이젠 저버린 지 오래다.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푸른색 줄무늬가 있는 흰색 환자복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끝없이 잠드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그는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맺힌 눈물은 그의 볼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고, 조용히 침대를 적셨다. 그것은 고요한 흐느낌이었고, 천장을 뿌옇게 만드는 슬픔이었다. 그는 오늘 밤, 그 슬픔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그러자 그의 의식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라도 할 듯, 심연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기나긴 밤이었지만, 너무나도 짧은 밤이었다. [박정민/국어국문학과]

 

<정류장의 들꽃>

그 남자를 보면 떠오르는 단어는 들꽃이었다. 아니, 들꽃보다도 더 아름답고 여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항상 그곳에 서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의 아동용 우산을 손에 쥔 채, 누구 한 사람 오래 머물지 않는 낡아빠진 버스 정류장의 옆에서. 그는 그렇게 서 있었다. 가끔 비가 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남자는 분홍색의 우산을 조심스럽게 펼쳐 정류장 표지판 옆에 살며시 기대어 두었다. 자신은 차갑게 내리치는 빗방울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말이다. 그는 언제나 소매가 닳고 물이 빠져버린 세월의 정장을 입고, 인적 드문 그 정류장에서 숨을 죽인 채 누군가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한 구석의 들꽃처럼.

내가 남자를 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부모님의 등쌀에 못 이겨 대교를 건너 버스로 한참을 가야하는 도시의 학교에 다니게 된 나는, 아침마다 시외로 나가는 버스를 타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남자와 조우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나는 지금에서야 생각을 하기도 한다. 멀끔한 정장차림의 그는, 간간히 흰 머리가 빠끔히 고개를 내민 머리칼을 깨끗이 왁스로 넘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분홍색의 배경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공주님 캐릭터가 그려진 자그마한 우산을 한손에 들고, 그는 사람이 거의 오가지 않는 버스정류장 옆에 차분하게 서 있었다. 남자에 대한 첫 인상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 무렵에도 범죄는 도시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범죄자들은 모두 외관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뉴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며 익히 알고 있었던 나였기에, 남자에 대한 은근한 공포감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좋지만은 않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잠재적 범죄자라고 보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유순하고 조용한 사람처럼 보였다.

언젠가 동네 아주머니들이 남자를 보면 수근 대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귀신이 들렸다는 둥, 어르신들을 노리는 빈집털이라는 둥, 시골사람들을 속이려고 온 사기꾼이라는 둥... 거기에는 부녀자들이나 어린 아이들을 노리는 변태다라는 말까지. 아마 내가 듣고 볼 수 있는 나쁜 범죄의 표본들은 모두 남자에게 대입시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 비해 동네 어르신들은 그를 대하는 것이 조금 달랐다. 언제나 남자를 보면 혀를 차곤 했지만,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며 남자를 곧잘 다그치곤 했다. 간간히는 아프지 않게 남자를 때리며 구박하는 듯한, 말을 흘리시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듣고 맞으면 서도 남자는 속없이 웃으며 그 상황을 넘기려고 하는 것을 나는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었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불안해진 동네 아주머니들이 남자를 경찰에 신고하여 동네 경찰관 아저씨들이 신고가 들어왔다며 그를 연행하기도 하였지만, 남자는 아무런 반항 한번 하지 않고 점잖게 “그렇습니까?” 라는 중후한 음성을 내뱉으며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따라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등교를 하기 전 아침을 먹던 중, 하품을 하며 소파에 몸을 던지는 아버지를 보자 문득 남자가 떠올랐다. 분명 남자도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겠지. 나는 밥을 입으로 밀어 넣으며 앞치마를 풀며 소파로 가는 엄마를 향해 말을 던졌다.

 

“엄마. 맨날 정류장 옆에 서있는 아재 본 적 있나?”

“그 아 우산 들고 댕기는 사람?”

 

내 말에 엄마는 표정을 달리하더니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듯 눈을 크게 뜨며 흥분해 말을 이었다.

 

“세상도 말세제. 그 남자 변태라카데? 고마 변태도 아니고 기집아고 머스마고 다 싸잡아 간다카데. 글씨 옆집 짐숙이 어매가 말이제...”

 

엄마가 하는 말은 반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이 소파에 앉아 아빠와 맞장구치며 남자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엄마의 말은 옆집 진숙이 엄마, 약국의 경림이 아줌마, 앞집의 진혁이 엄마... 동네 아주머니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마구잡이고 섞어놓은 근거도 없는 소문들뿐이었다. 언젠가 들었던 남자의 범죄자 설이라던가, 변태설이라던가, 거기에 아동범죄자 설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나는 도저히 그것이 납득이 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이해를 하기도 싫다는 생각에 남아있던 어묵볶음을 반쯤 입으로 우겨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가나? 우야든 말이제. 꼭 조심해야 하는기라. 물 거 사준다고 따라가믄 안돼고. 니는 얼라 때부터 낯을 너무 안가린께... 들었제? 대답하고 가그라!”

 

현관문을 열고나서는 내 뒤통수를 향해 몇 번이고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에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나는 현관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나도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 무엇 하나 없었지만, 정말 단순히 그 남자에 대한 험담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남자의 핏줄이 불거진 투박하고 큰 손은, 분홍색의 아동용 우산을 쥐고 잘게 떨고 있던 그 시큰하고 안타까운 손이었다.

그 다음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전날 저녁부터 창문을 내려치던 빗방울들은 점점 굵어져,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억세 같은 빗방울이 마당의 흙을 깊게. 깊게 패어내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정말이지 싫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버스가 빨리 달릴 수가 없어 도착시간이 늦어졌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지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비가 오는 날은 버스를 타면 앞도 거의 보이지 않아 버스가 더욱 천천히 달린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 수 있었기에, 나는 평소보다 조금 빨리 집에서 출발 해 정류장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교복치마로 들쳐오는 굵은 빗방울. 읍내 시장의 갑판에서 엄마를 졸라서 산 하얀색의 운동화는 진흙이 튀어 본래의 깨끗함은 찾아도 볼 수 없었다. 이놈의 비는 얼마나 내릴 생각인지... 투덜거리며 바람에 기울이고 있던 우산을 들자,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정류장에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디인지 허전한 정류장. 나는 어디선가 덮쳐오는 의문감에 조금 빠르게 걸어 그곳으로 다가가며 정류장 옆에 언제나 서 있는 그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벽 여섯시 경을 달리는 시간.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세찬 비바람을 고이 맞으며 그곳에 서 있었다. 아무리 그 남자라도 이런 고집스러운 날씨에는 여기까지 나오지 않는구나 라며 속으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순간, 어디서인가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비닐의 소리와 찰박이는 발자국 소리에 나는 놀라 고개를 급히 돌렸다. 그곳에는 바알간 장미를 한 다발 품에 안고 여느 때처럼 분홍색의 우산을 든 남자가 보였다. 잰걸음으로 정류장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손에는 검은색의 커다란 우산이 들려있었고, 그는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분홍색의 우산을 표지판 옆에 기대어 두고 꽃다발을 고쳐 들었다. 그것을 힐끔거리며 바라보고 있자 입이, 그리고 혀끝이 간질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을 걸어보고 싶다는 여태껏 생각했던 생각이 ‘팡!’하고 소리 내며 터질 것만 같은 기분에 손등으로 입을 막고 서 있던 중, 비바람에 날려 내 발치로 떨어진 장미꽃잎을 바라보자 결국에 벌어진 입술의 틈사이로 의문의 휘파람이 소리 내며 튀어나왔다.

 

“아재. 그거 누구 줄라꼬예?”

 

항상 같은 곳에 서 있지만, 다른 공간에 존재했던 우리 둘 사이에 벽이 한 꺼풀 벗겨져 날아갔다. 갑작스러운 나의 물음에 남자는 한순간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웃으며 딸아이에게 줄 선물이라고 입을 열었다. 그것이 남자와 나의 첫마디. 그리고 그에게 한 발 다가가는 첫 걸음이었다.

남자는 생각 이상으로 온화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딸의 우산이라는 분홍색의 우산을 손에 들고, 딸에 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묵직한 음색으로 들려주었다. 딸의 이름은 소원이라고 했다. 아내와 함께 밤낮으로 그렇게 소원하며 기다리던 아이라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그는 나긋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었다. 그 날 이후로 매일 아침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는 남자는 조용하게 웃으며 아침인사를 나에게 건네어 주었고, 가끔은 지루하기만 한 내 고민부터 학교에 대한 짜증 섞인 투정까지 무엇이든 들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남자에 대하여 이해하고, 그를 있는 그대로. 직선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그에게 다가가도 물을 수 없는 것이 단 한 가지가 있었다. 무엇이냐고? 바로 분홍색 우산. 어째서 그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그 우산을 그리도 애지중지 들고 다니는 것일까. 날이 갈수록 짙어지는 의문에 혹시 어쩌면 그가 엄마나 동네에서 말하는 대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아닐까라는 못된 생각까지 하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그 날도 머릿속에는 오늘은 꼭 물어보자. 오늘은 꼭 물어보자. 이 한가지의 생각뿐이었다. 나는 정말 순수하게 그와 그 우산에 얽힌 어떠한 사연에 대하여 호기심이 있었고, 그 사연은 나에게 커다란 감정을 실어 줄 것만 같아 더더욱 궁금했던 것이었을 뿐이었다. 내 질문으로 인해 남자가 상처받지 않을까? 아니, 그 당시의 나에게는 그런 생각을 가진 다는 그 자체를 상상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저 내 호기심에 그의 감정을 묻어 안중에도 없는 일처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이러한 호기심은 이에 대한 답을 얻는 그 순간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 쏴아하고 사그러들며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교하는 시외버스 안에 있던 아주머니들의 수다에서 나는 그에게 묻기도 전에 알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남자는 사십대 중반의 나이이며 읍내에 사는 땅 부자 할머니의 아들이라고 했다. 남자는 서울에서 주말마다 이곳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는 주말부부였으며, 건강이 나빠진 아내를 위해 거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했다. 그러던 중 육년 전, 딸의 생일날 서울로 출근을 위해 돌아가 버린 남편을 대신해 시외로 여섯 살 배기의 딸과 함께 생일 선물을 사러 나간 모녀가 고속도로에서 난 빗길 사고로... 나는 눈을 꼭 감고 아주머니들의 뒷자리에 앉아 숨을 훅 들이마셨다. 고속도로에서 난 빗길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이야기. 어렸던 나에게는 너무나도 당혹스럽고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고, 나는 무섭고, 떨리는 마음을 한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숨을 죽이고 아주머니들의 몹쓸 수다에 집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앞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들은 남자가 딸과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회사까지 그만두고 매일 아침부터 시외버스가 끊길 때 까지 그 자리에 서서 딸아이의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가 오던 그날, 우산을 챙겨가지 않은 딸아이가 돌아 올까봐. 제 엄마의 손을 잡고 우산을 달라며 달려 올까봐. 나는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북받쳐 올라오는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감수성 예민한 중학생이기 때문에? 아니, 남자의 모습은 단순한 집착이나 받아드릴 수 없는 현실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아냐며 나를 추궁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 할 것이다.

 

“그와 한번이라도 이야기 해본 적이 있나요?”

 

그 누구도 남자와 깊은 대화를 나누려고 한 적이 있을까? 남자는 정말로 그저, 언제나 그리워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 누군가에 대한 마음이라고. 그리움에 사무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남자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딸을 그리워했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그리고 붙잡을 수 없는 마지막을 그리워했다.

사람은 너무나도 간사해 남자의 사연을 듣고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남자가 나에게서 누군가를 겹쳐 볼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었기에 나만을 보며 그를 생각 하는 척을 한 것이었다. 딸을 그리며 홀로 아이를. 그리고 아내를 기다리고 있을 남자의 모습을 걱정 하는 것이 아닌, 그의 얼굴을 보면 동정해 버릴까봐. 나는 단순히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수 일 남자를 피해 그가 나오지 않는 이른 시간에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남자를 외면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을 질책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말도 없이 사라진 나에게서 소원이를 겹쳐 보지 않을까. 나는 그제야 그것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가 기다리는 그 정류장으로 그를 마주하러 갔다. 멀리서 보이는 남자는 언제나처럼 낡은 정장을 입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없이 작고 힘없는 그의 모습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그의 손에 서려있는 공허함. 그의 손에는 언제나처럼 분홍색의 아동용 우산이 들려있지 않았다. 그의 그런 모습에 다급한 마음에 나는 정류장에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그를 불렀다. 퀭해진 그의 눈동자에 담겨있는 나의 모습은 조금 흐릿하고, 멀어보였다. 그리고 그는 딸과 아내를 기다리던 그날의 얼굴이 아닌 세월을 자각해 버린 풍파를 지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태껏 그를 보며 부정했던 얼굴은 이것이었을까. 타인들은 지금껏 그를 이렇게 보고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에 애써 감추어 두었던 몽글몽글한 감정이 안에서 울렁였다.

 

“아재, 어디 아파예? 얼굴이 영 아이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은 탁하지만 맑은. 미묘함이 돌아나고 있었다. 무언가... 무언가 말로 형용 할 수 없는...

 

“아가씨. 난 말이야... 난... 그저 손을 잡아주고, 선물을 함께 골라주고 싶었어. 큰 것을 바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돌아오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어. 하지만 현실은 너무 냉혹했고, 나는 이미 내 손 틈으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잡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던 거야. 나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뜨거운 열말을 토해내는 그의 눈동자는 붉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가 손에 꼭 쥐고 있는 한 장의 그림은 남자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모퉁이고 닳고 찢어져 있었다.

 

“딸아이는... 소원이는 그저 함께 있고 싶었던 거야. 그 아이도 결국 함께라는 영원함을 그렸던거야...”

 

크레파스로 그린 오래된 그림은 여자아이와 남자, 그리고 여자가 손을 꼬옥 잡은 그림.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않 고, 외면 속에서 몸을 떨고 있던 그의 모습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는 소리 없는 발악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애처롭게 살아왔던 것일까. 그는 듣기 싫게 갈라진 목소리로 몇 번이고 고맙다며 웃어보였다. 시외버스로 올라타며 등을 보이는 그를 묶어 두던 자신을 향한 죄책감의 말뚝은 그렇게, 그의 눈물과 함께 정류장에 녹아들었다.

오래된 이야기는 여기까지. 나는 흔들리는 버스 차창을 바라보다 낡은 버스의 브레이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꼭 버스를 타고 오고 싶다고 고집을 피워 돌아온 나의 고향은 여전히 거름의 냄새가 코를 찔러왔고, 버스정류장은 삐걱 거리고 있다. 드문드문 칠이 벗겨져 녹이 슨 버스정류장은 바람에 흔들려 끼익 소리를 내며 나를 반겼고, 나는 그에 답하듯 빙긋이 웃어보였다. 오랜만에 남편과 딸을 데리고 돌아온 이 마을은 그 날의 남자의 모습을 흐릿하게 비추어 내고 있었다. 내 손을 잡는 딸아이의 자그마한 손에 나는 남자의 분홍색 우산을 기억해 내었다.

 

당신이 소중히 여기던 그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도 그 마음을 당신의 안에 메어두고 계십니까?

 

기억의 마침표를 찍으며 딸아이의 작은 체온을 느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들꽃향이 섞인 바람에 남자가 웃으며 대답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서다윤/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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