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인의 생애

 

주영중 교수(기초교육대학 창조융합학부)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1924년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오산학교에 입학한다. 지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같은 학교 선배인 시인 김소월을 동경했다고 한다.

백석은 조선일보의 후원을 받아 1930년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34년 동경 청산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일보 기자와 계열잡지인 󰡔여성󰡕지에서 편집 일을 맡는다. 그는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한 후,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시단 활동을 전개한다. 1939년에는 만주의 신경으로 이주하여 얼마동안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근무했지만 이후 뚜렷한 직장 없이 유랑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가 시들을 다수 발표했고, 6·25 전쟁 뒤에는 북한에서 다양한 번역 활동과 시작 활동을 하였다. 시인은 1995년 84세의 나이로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잃어버린 유년 공동체의 회복

 

백석의 초기 시는 유년의 눈에 비친 고향과 그곳에서의 경험, 느낌 등을 아름답게 시화한다. 그곳은 순수한 동심과 놀이의 세계이면서 공동체적 삶이 펼쳐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그곳은 전설과 샤머니즘, 다양한 음식과 전통이 어우러진 화해롭고 평화로운 공간으로 제시된다. 시에 드러나는 이러한 요소들은 식민지 현실 속에서 훼손되어가는 민족 고유의 삶과 정서를 되살리려는 시인의 욕구가 작용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여우난골族｣이란 시는 백석의 초기 시세계를 가늠해볼 수 대표작이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촌 엄매 사춘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기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 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릇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골족族｣ 전문

 

여우가 나올 정도로 깊은 산골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전통적 명절풍속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풍성한 음식과 재미있는 놀이는 명절에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살던 ‘여우난골족’ 사람들은 현실에서의 힘겨운 삶을 잠시 내려놓은 채 평온과 만족감, 설레는 감정 속에서 명절을 맞는다. 유년의 화자는 ‘여우난골족’에 오랜만에 모인 사람들의 생김새와 삶의 이력들을 소환해내어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시에서 백석은 잃어버렸던 혹은 사라지고 있는 공동체적 삶의 원형을 되살려낸다. 그것은 방언의 세계이면서 토속적 풍속의 세계이고 풍요로운 감각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융화하며 하나의 축제의 장을 만들어나간다. 병렬과 나열, 반복과 리듬으로 가득 찬 언어들을 통해 그러한 정경과 움직임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시라 하겠다.

 

3. 유랑과 슬픔의 한 시절

 

한편 만주를 비롯한 북방 지역을 돌며 썼던 후기 시들은 백석의 유랑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백석은 기행지에서 느끼는 객수와 정경들을 우리에게 슬프고도 아름답게 펼쳐 보여준다. 이러한 시들은 분명 당대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도, 타인과 자신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가운데 현실을 넘어서려는 의지적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시의 또 다른 정점을 보여준다.

다음에 소개하는 ｢흰 바람벽이 있어｣는 백석의 후기 시세계를 대표하는 시라 할 수 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흰 바람벽이 있어｣ 전문

 

성인 화자는 화해롭고 평화로운 유년 세계에서 멀리 떠나와 현실 속을 유영한다. 당대인들의 고단한 삶과 마찬가지로 화자 또한 그런 세계 속을 떠도는 것이다. 혈연 공동체와 멀리 떨어져 유랑하는 삶은 외롭고 쓸쓸하다. 화자는 그런 삶을 자기 운명이라 생각한다. 그럴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사랑과 가족과 따스한 음식이다. 흰 바람벽에 영상처럼 늙은 어머니가 보이고 대굿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 아내와 자식이 보인다. 이 상상의 세계는 그리움이 불러낸 환영일 것이다.

곧이어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유랑 속에서 화자는 더 높은 것과 더 깊은 사랑을 느낀다. 그것이 시인 아니 인간의 운명일지 모른다는 인식은 홀로 떠나야 하는 실존적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운명 속에서도 더 높고 더 깊은 그 어떤 것을 찾아가는 행위는 적극적 자기 의지의 표명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역설적 자기인식을 동반한다.

 

4. 백석 시의 의의

 

백석 시가 본격적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1987년 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루어진 이후 백석 시는 조금은 뒤늦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이후 많은 문학 연구자들에 의해 관심이 증폭되었고 이제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비교적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백석 시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시어와 시어들의 운용 양상이다. 백석은 방언, 특히 자신의 고향이었던 평북 방언-정주 방언을 많이 사용한다. 읽어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고유 명사나 그 지방 특유의 다채로운 어휘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백석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매혹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시 속 친근한 민족 고유의 정서와 풍물 등이 우리들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백석은 우리 민족과 언어, 문단이 위기에 처한 시기에 시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개성적이면서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모더니즘이 추구하던 도회적인 색채에서 벗어나 민족의 언어와 토속적 풍물과 방언, 공동체적인 삶과 민족의 시원을 형상화하려는 백석의 시는 현대시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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