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계몽의 빛과 그늘

변 상 출(기초교육대학 창조융합학부 교수)

요즈음 학계나 산업계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말이 ‘4차 산업혁명 시대’, 또는 ‘인공지능 시대’라는 말이다. 향후 우리의 삶에서 엄청난 변화를 예감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의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지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일상적 삶의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것이 이른바 ‘과학혁명’이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은 명예혁명과 산업혁명, 프랑스혁명과 같은 소용돌이를 함께 일으켰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과학혁명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에 여러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제공했다. 그리고 중세의 질곡으로부터의 사회적・정치적 해방까지 덤으로 안겨주었다. 오늘 우리가 사회적으로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물질적 빈곤과 생물학적 질병에서 제한적이지만 상당히 자유로워진 것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과학혁명’이라는 진원지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이 ‘제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말에도 별로 놀라지 않는 것은 어쩌면 과학의 해방적 성격에 대한 확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이런 확신을 의심하라고 조언해주는 책이 있다. 󰡔계몽의 변증법󰡕이 그것이다. ‘도구적 이성instrumentalle Vernunft’이라는 개념어로 유명한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와 아도르노(Th. W. Adorno)가 함께 쓴 저작이다. 이 책은 아도르노의 제자이자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세계적 권위자인 하버마스(J. Habermas)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으로 통한다. 이 책이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으로 통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쓰인 것으로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이 고스란히 배어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 독일이 유태인 600만 이상을 독가스 실에서 대량으로 학살한 끔찍한 사건은 더 이상 “서정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할 만큼 절망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직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순식간에 수십만 명을 사라지게 만든 원자폭탄은 과학과 ‘인간 이성’(理性, Vernunft: Reason)을 근원적으로 되돌아보게 했다. 특히 ‘만물의 영장’ 노릇을 가능하게 한 ‘인간의 이성’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독가스든 원자폭탄이든 이것은 분명 과학의 산물이지만, 이 과학을 낳은 것이 바로 인간의 이성이기 때문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바로 이 ‘인간 이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다. 대개 20세기까지 사람들은 이성에 의한 인류의 무한진보라는 헤겔(G. W. F. Hegel)적 믿음에 대해 확신했다. 그런데 인간 이성에 대한 아도르노의 독특한 반성 지점은 바로 이 같은 오랜 관습적 확신에 대해 의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성 그 자체’에 억압적 요소가 내장되어 있다고 보는 점에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성’은 ‘자기보존’이라는 나름의 합리적 논리를 앞세워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해온 것이 서구 이성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비판하는 계몽의 관점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통하는 데카르트(R. Decartes)의 이성주의와 ‘3대 비판서’(󰡔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로 널리 알려진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I. Kant)의 ‘계몽’ 개념에 대한 비판과 관련되어 있다.

데카르트는 그의 유명한 책 󰡔방법서설󰡕에서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사실 고대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비친 자연의 모습은 ‘공포’와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 공포와 숭배의 대상이었던 ‘자연’을 지배와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겠다는 데카르트의 꿈이 아도르노는 바로 근대 계몽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고 이해한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 첫 시작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보적 사유라는 포괄적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완전히 계몽된 지구의 재앙’을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의 ‘참상’으로 읽을 수 있다.

󰡔계몽의 변증법󰡕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이 책에 <부언설명>으로 실려 있는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이다.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의 <부언설명>에 따르면 이성적 책략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부터 자신의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는 항해에서 포세이돈과 사이렌 등 여러 공포의 신들을 만나지만 ‘이성’으로 무장한 오디세우스가 결국에는 승리하고 고향 이타카에 무사히 귀향한다. 그러나 이 귀향이 해피엔딩이 아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읽은 독자들은 알겠지만 오디세우스의 이타카 귀향은 대량학살로 끝이 난다. 겉으로 보면 트로이로부터 이타카에 이르는 과정이 승승장구하는 이성의 역사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공포’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이 노정이 서구의 근대로부터 히틀러 3제국에 이르는 길과 유사하다고 보는 것이 󰡔계몽의 변증법󰡕이 내리는 결론이다.

아도르노는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따지는 근대적 사유를 ‘계산적 사유’라고 부른다. 이 사유는 칸트적 계몽 개념의 규정에 정립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하는 또 다른 <부언설명> 가운데 하나인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은 칸트의 계몽 규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계몽은 “스스로에 기인한 미성숙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며,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는’ 사유는 아도르노의 표현으로 하면 ‘계산된 사유’이다. 이 ‘계산된 사유’를 잘 간추려 설명하는 글이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또 다른 <부언설명>으로 논파하고 있는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이다. 󰡔계몽의 변증법󰡕의 <부언설명 2>에 해당하는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은 아도르노가 ‘사디즘sadism’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장본인인 18세기 프랑스 귀족 작가 사드(M. De Sade) 백작의 󰡔줄리엣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이라는 소설을 읽고 ‘창의적 글쓰기’로 표현한 비판적인 글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악덕의 주인공 ‘줄리엣’은 철저히 ‘계산된 사유’로 똘똘 뭉쳐진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실패한 아버지도 동정의 시민적 도덕관을 가진 나약한 여동생도 ‘이익’이라는 ‘계산된 사유’ 앞에서는 무정하게 버려야할 대상일 뿐이다. “약자나 실패한 자들은 멸망해야 한다”는 것이 ‘계산된 사유’ 앞에서는 제1명제로 통한다. 철저히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니체(F. Nietzsche)의 ‘힘을 향한 의지Wille zur Macht’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이성이나 계몽이 ‘한줌의 도덕’일지라도 ‘모럴Moral’로 무장하지 않을 때에는 얼마나 위험한 것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계몽의 변증법󰡕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의 고유성이자 인간의 특권으로 여겨왔던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성찰한 이성은 지금까지 신뢰해왔던 것과는 달리 인간의 이성은 충분히 ‘해방적’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억압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내린 결론은 근대적 계몽의 프로젝트, 즉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는 실패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계몽의 1차적 목표’는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는” 것인데 원자폭탄을 넘어 수소폭탄으로 인류가 단번에 절멸할 수 있다는 엄청난 새로운 ‘공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성해보면, 아우슈비츠의 독가스 공포와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공포는 이미 신화와 같은 옛이야기처럼 들린다. 끔직한 공포의 역사가 신화처럼 들리는 것은 이미 우리가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넜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역사적 경험의 공포가 가상의 신화적 공포가 아니라 현실의 실제적 사건임을 말해주는 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이다. 후쿠시마는 󰡔계몽의 변증법󰡕을 반드시 새로이 읽게 만드는 ‘계몽’의 또 다른 얼굴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프로메테우스의 불빛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저주만을 안겨다줄 어두운 ‘판도라의 상자’인가 반성이 무조건 필요한 때이다.

‘인공지능’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는 우리에게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엮어낸다. 기대는 ‘인공지능’이 우리의 노동을 대신해주고, 우리는 여가를 즐길 시간이 늘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에 의존하고 있고, 불안은 ‘인공지능’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재의 종을 아예 사라지게 만들 것이라는 과학적 우려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와 불안에서도 우리가 희망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붙잡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의 상태”서 벗어나라고 요청하는 칸트적 계몽의 불빛을 따라 걷는 길이고,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 말미에서 “스스로를 완전히 자각하고 힘을 가지게 된 계몽만이 계몽의 한계를 분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간신히 전해주는 ‘반성된 사유’를 곱씹어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