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대학로가 서울만큼 활성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소극단의 연극을 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터넷을 통해 보고 싶은 연극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나와 있는 정보가 적을뿐더러 워낙에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터라 찾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로드 투 파라다이스’ 공연을 하고 있는 ‘예술 극단 온’도 마찬가지였다. 번화가인 동성로 근처에 있다고 해도 중구 동인동은 위치 정보가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았다. 겨우 찾은 간판이 무척 반가울 지경이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텝으로 보이는 사람은 네 사람 정도 뿐. 아무리 소극단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적은 사람이 이끌어나가나? 걱정도 잠시, 연극의 시작과 동시에 관객들은 진한 어둠에 빠져든다.

무심코 넘긴 대사 속에 담긴 가슴 저린 이야기들
한 시간 남짓 되는 공연 시간 동안 관객들에게 보여 지는 인영은 삼류 건달인 남자 주인공과 화류계 여자인 여자주인공 둘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명의 핵심적 인물이 더 존재한다. 바로 이들의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존재인 ‘권력자’이다. 여자는 한때 권력자의 연인이었으나 그의 명령을 받은 남자로 인해 밀폐된 공간에 갇히게 되고 이는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다.

“따르릉~”좁고 밀폐된 공간 안에 여자를 향한 남자의 일방적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울리는 전화벨소리. 벨소리의 주인공은 여자와 남자의 공통분모라고 볼 수 있는 존재인 ‘권력자’이다. 관객들에게는 권력자의 모습이 보이지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지만 전화 한통으로 인해 극명하게 달라지는 주인공들의 행동으로 인해 그 존재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전화를 받기 이전, 남자가 여자에게 온갖 욕설과 구타를 시행했던 반면에 전화를 받고 난 후에는 주도권이 여자에게로 가서 여자가 남자를 향한 온갖 욕설과 구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한번 뿐만이 아니라 몇 번씩 반복되는데 이것은 모두 권력자의 전화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러한 상황 속 그들의 대화에서는 국회의원의 존재가 언급이 되는데 여기서 국회의원은 그들의 권력자와 친분관계를 지닌다. 이를 보았을 때 권력자는 사회적으로도 꽤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한마디에 상이하게 달라지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현대 사회에서의 권력자에게 무능력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관객들을 씁쓸하게 한다.

“한때 내 꿈은 개그맨이었어.”로 시작된 남자의 말은 엉뚱한 타이밍에 튀어나와 관객들을 의아하게 만든다. 남자는 곧이어 ‘개그맨’이란 직업에 걸 맞는 현대식 개그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흥미를 더한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서류를 내러 가는데 데스크의 여자가 중졸은 취급하지 않는다더군.” 남자의 대사는 학벌 지상주의가 만연한 우리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는 어딘가에 취업을 한다거나 입시를 할 때 학벌과 성적이 평가의 척도가 된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고등학교 졸업 후에 대학 진학은 당연한 사실이 되어버렸고 대학, 심지어는 학과에도 순위를 매겨 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한다. 남자의 경우에는 학벌이 직접적으로 아무 관련 없는 직업 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 자질’이라 치부되는 학력이라는 걸림돌로 인해 도전의 자격조차 얻지 못한다. 누군가의 꿈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잣대로 인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많은 남자들을 만나왔지만 정작 날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어.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여자는 직업상의 이유로 많은 남자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말을 하며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실제 여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는 대다수의 여성들이 원하는 외형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늘씬한 몸매에 또렷한 이목구비는 여성들에게 선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인생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한다.

“우린 아직 젊어. 뭐든지 다시 시작 할 수 있어. 우리 같이 여기서 나가자!”
권력자에게서 버려져 자포자기하고 있는 남자에게 여자가 던진 희망적인 말이다. 이 말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고 또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다시 일어서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마지막에 두 남녀 주인공이 손을 붙잡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앞으로 펼쳐질 그들에 앞길에 대해 축복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연극의 현실을 비단 허구(fiction)로 보지 않고 나아가 우리 삶의 일부분이라 받아들인 까닭이다. 대사 속 유난히 많은 욕설은 관객 중 어떤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모습들은 그만큼 이 사회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힘없는 자들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렇듯 배우의 대사 하나, 행동 하나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각자 나름의 의미들을 충분히 담고 있었다.

단순히 웃고 즐기는 것이 아닌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연극과 드라마, 영화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그 일례로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드림하이 2’에서는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는 B급 인생이지만 A급을 꿈꾼다.” 이 드라마 역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주류들이 아닌 비주류들의 이야기로서 같은 처지의 시청자들로 하여금 웃음과 눈물을 주었다. 이렇게 비주류의 인생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 연극에 사람들은 공감과 위안을 얻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삶을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삶이라 생각하지 않고 내 자신, 혹은 가족이나 친구의 삶이라 생각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그 느낌이 단순히 공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이를 시정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