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신문은 이번 개교기념호부터 정호완 명예교수(국문학)의 우리말 나들이 <짐승이름>을 연재한다. 이 글은 2008년 4월부터 2009년 9월까지 한겨레신문에 연재됐던 것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이번 호에서는 그 전문을 게재하고 다음호부터는 대구대신문을 통해서는 요약문 형식으로, 인터넷 대구대신문(http://unews.daegu.ac.kr)을 통해서는 전문을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호랑이 이야기

호랑이 모르는 길을 생쥐가 안다. 저마다 남모르는 능력과 정보가 있다는 얘기다. 단군신화에는 곰과 함께 범이 등장한다. 범과 곰은 두루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었는데, 곰은 됐으나 범은 못 됐다. 토템이란 관점에서 보면, 상징으로 곰을 내세우는 겨레가 범을 내세우는 겨레를 이겨낸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파일(初八日)에서 15일까지 서울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興輪寺)의 탑을 도는 복회(福會)를 행했다. 신라 원성왕(元聖王) 무렵 김현(金現)이라는 선비가 서라벌에 살았다. 밤이 깊도록 혼자서 탑을 돌고 있었다. 그 때 한 낭자 또한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말 없는 가운데 서로의 마음이 통하여 돌기를 마치자 으슥한 곳으로 숲에 들어가서 정분을 나누었다(삼국유사 참조).
낭자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니 낭자는 극구 사양하고 거절했지만 김현은 굳이 따라 나섰다. 길을 가다가 서산 기슭에 다다라 한 초가집으로 들어가니 늙은 할머니가 낭자에게 물었다.
“함께 온 사람은 누구냐.”
낭자가 사실대로 말하자 늙은 할머니는 말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없느니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어서 나무랄 수도 없으니 은밀한 곳에 숨겨 두어라. 네 오빠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
하고 김현을 구석진 곳에 숨겼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뒤에 세 마리 범이 으르렁 거리며 들어와 사람의 말로 말했다.
“집에서 짐승의 비린내가 나니 잘 되었다 배고픈 참에.”
늙은 할머니와 낭자가 꾸짖었다.
“너희 코가 잘못이다. 무슨 미친 소리냐.”
이 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즐겨 목숨을 해치는 것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행을 벌하겠노라.”
세 호랑이들은 이 소리를 듣자 모두 큰 걱정을 하게 되었다. 낭자가
“세 분 오빠께서 만약 멀리 피해 가면 내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모두 기뻐하여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며 달아나 버렸다. 낭자가 들어와 김현에게 말했다.
“처음에 저는 선비께서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숨김없이 감히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저와 선비님은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하루저녁의 정분을 나눈 부부의 의를 맺었습니다. 세 오빠의 악행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시니 한 집안의 재앙을 저 혼자 받으려 하오나,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 은덕을 갚는 것만 하겠습니까. 제가 내일 성안에 들어가 몹시 난동을 부리면 나라 사람들은 저를 어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임금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 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저를 따라 성 북쪽의 숲속까지 오시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은 말했다.
“사람이 사람과 사귐은 인륜의 도리지만 다른 짐승과 사귐은 대개 떳떳한 일이 아니오. 그러나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다행인데 어찌 차마 아내의 죽음을 팔아 한 세상의 벼슬을 바라겠소.”
낭자가 말했다.
“낭군은 그 같은 말을 하지 마시오. 이제 제가 일찍 죽는 것은 대개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저의 소원이요. 낭군의 경사이며, 우리 일족의 복이요,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 번 죽어 다섯 가지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 터에 어찌 그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불경을 강론하며 좋은 과보(果報)를 얻는데 도움이 되게 해 주신다면 낭군의 은혜, 이보다 더 큼이 없겠습니다.”
그들은 서로 울면서 헤어졌다. 다음 날 정말로 사나운 범이 성안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해치니 감히 당해 낼 수 없었다. 원성왕이 듣고 영을 내려,
“범을 잡는 사람에게 2급의 벼슬을 주겠다.”
고 하였다. 김현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었다.
“소신이 해보겠습니다.”
왕은 먼저 벼슬을 주고 격려하였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속으로 들어가니 범은 변하여 낭자(娘子)가 되어 반갑게 웃으면서,
“어젯밤에 낭군과 마음속 깊이 정을 맺던 일을 잊지 마시오.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
하고는, 이어 김현이 찬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김현이 숲속에서 나와서,
“범을 잡았다.”
고 말했다. 그리고 그 사연은 숨기고, 다만 범에게 입은 상처를 그 범이 시킨 대로 치료하니 모두 나았다. 지금도 민가에서는 범에게 입은 상처에는 역시 그 방법을 쓴다. 김현은 벼슬에 오르자, 서천 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하고 항상 범망경(梵網經)을 강론하여 범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또한 범이 제 몸을 죽여 자기를 성공하게 해 준 은혜에 보답했다(삼국유사 참조).
범은 만주어 비럼(bir?m)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참고로 몽고어로는 발스(bals)라 한다. 오늘날의 범은 [벋]에서 [벌]로, 다시 벌엄-버럼-버엄-범으로 바뀌어 굳어졌다(서정범). 옛말에 호랑이는 달리 갈웜(훈몽자회)이라고도 이른다. 갈웜은 갈범에서 비롯된다. 일본말로 호랑이는 도라(dora)다. 그 원형은 돋>돌로 바뀌었으며, 같은 소리의 틀로 재구성할 수 있으니, 그 형태는 닫(dat)이었다.《향약구급방》에서는 호랑이를 ?둘흡〔地頭乙戶邑〕이라 적고 있다. 기원적으로 보아 닫과 ‘?-다’로 그 대응성을 상정할 수 있다.
견훤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밭일을 하는 사이에 범이 내려와 견훤에게 젖을 먹여 길렀다고 한다. 높고 깊은 산골짜기에 세운 산신각에는 호랑이가 산신을 태운 그림들이 걸려 있다. 이는 범이 사는 산의 신을 숭배함에 그 뿌리를 둔다.《후한서》동이전에, 범한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고 하였다. 특히 흰 호랑이를 영험한 신으로 모시며, 서쪽을 상징한다. 12지신의 하나이기도 하다. 신과 자연과 생명을 경건히 여기는 문화 복원이 시급하다.

  어흐흥 기가 죽어 옴짝달싹도
  먹잇감 될 밖에
  정화수 장독대엔 달맞이 꽃이     
  혼불에 향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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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정호완 (hwjeong@daegu.ac.kr)
▲대구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시조시인. 삼국유사 사업위원회 대표
▲(저서) 우리말의 상상력 외 3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