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화창한 봄날 환웅을 찾아간 곰과 호랑이는 무릎을 꿇고 빌었다.
“환웅님, 저희들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환웅은 쓰다 달다 말이 없다.
“어떤 고생이 되더라도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 어리석은 짐승들에게도 길을 열어 주십시오.”
“글쎄. 쉬운 일이 아닌데.”“제발요.... .”
“내가 하라는 대로 따르겠다 이거지.”
“그렇고 말굽쇼. 어느 안전이라고 다른 말을.”
환웅이 주는 쑥과 마늘을 받아서 햇빛을 보지 않고 백일 동안을 견디라는 것이다. 굴속에 들어간 지 며칠이 지났을까?
호랑이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곰순아. 쑥과 마늘만 먹고는 난 도저히 못 견디겠다. 우리 저 넓은 세상으로 같이 나가서 사이좋게 살자.”
호순이는 견디다 못해 굴을 나가 버린다. 홀로 남은 곰순이는 외롭고 힘든 나날을 견디면서 죽을 것만 같은 외로움과 배고픔을 참고 스무 하루 만에 문득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말이 곧 힘이며 말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인가.
압록강 어름에는 다투어 피는 철쭉이며 자작나무 잎이 우거지고 있었다. 금강하(錦江河)의 깊은 굴 같은 물길에는 천지 못에서 흘러나온 신령한 냇물들이 노래하며 흘러 송강하(松江河)로 들어가고.
나물을 뜯던 웅녀는 물소리를 들으며 새소리를 듣고 문득 누군가 그리운 마음에 목소리를 돋우어 흥타령을 불렀다.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났을까? 자신도 모르게 환웅님이 계신 동굴로 다가갔다.
“환웅님, 저도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저에게 귀여운 아이를 갖게 해주십시오.”
그 역시 아무 말이 없었을 뿐. 그러기를 여러 차례. 하루는 신하에게 웅녀를 데려 오라고 하였다. 그는 이미 남자로 변신하여 웅녀를 맞고 있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나의 진달래여. 그대 내게로 오라. 앞으로 아이를 낳거든 단군이라 하시오.”
참으로 저녁노을 곱게 물든 그런 하루 밤을 보냈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같은 그런 황홀한 사랑의 하루였다. 꿈인 듯 생시인 듯. 그 사랑스럽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새소리 가득한 미인송 그늘의 벌 소리만 윙윙거리고. 황금의 노을이 물든 구름이 백두산 천지에 명주 비단으로 흘러내리듯 그렇게 서서히 흘러가고 있었다.

“내님은 어디로. 임이시여.”
만나자 이별이라. 그 무덥던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 어느 추운 날 아이를 낳았으니 환웅님의 말대로 단군(檀君)이라 하였다. 단군이란 본디 신(神)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곧 부족의 우두머리를 일컫기도 하는 말이다. 아, 그럼 이 아이가 자라서 이 겨레를 이끌어갈 지도자란 말인가. 온갖 정성을 다해 길렀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어머니 혼자서 해내고 어린 단군을 길렀다. 무서운 호랑이와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숲속에 집을 짓고 살자니 어려운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무럭무럭 자라난 단군은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 단군은 스승이라고도 일렀다. 단골 혹은 당골이라고도 한다.
스승이란 무당을 이른다. 솟대에 올라가 아침저녁으로 빌었다. 갈라진 겨레를 아우르고 통일된 나라를 이루게 해달라고. 백두산 호랑이를 주름잡는 활쏘기와 말 달리기는 따라 잡을 사람이 없었다. 시월상달 그의 생일이었다.
“다른 겨레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혼자서는 살 수 없으니.”
“오마니.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삼국유사》에서는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적고 있다. 그렇다. 고마(곰)을 조상신으로 하는 겨레뿐이 아니고 호랑이도 승냥이도 함께 갈 수 있는 세상을 열어야 한다. 그밖에도 발이며 소며 돼지며 순록의 겨레들도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단군은 마침내 광개토 대왕이 꿈꾸는 그런 커다란 나라를 이루었으니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곰도 한 가지 재주는 있다. 누구나 타고난 저 나름의 소질이 있으며 이를 인정해 살려야 한다. 우리나라에 가장 확실한 자원이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람인데 아옹다옹 하고 살지만 우리 겨레의 뿌리를 떠올리면, 곰은 거룩한 존재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다. 곰 여인의 소중함이 이를 데가 없다. 곰이 단군의 어머니이고 백두산은 달리 웅신산(熊神山)이며 금강(錦江)의 본 이름이 웅진(熊津)이었음을 고려하면 예사롭지 않다. 이는 곰 숭배에서 말미암는다.
옛말에 곰은 고마였다(신증유합). 곰이야말로 경건하게 삼가서 흠모해야할 대상이었다(고마 敬 고마 虔 고마 欽). 단군신화에서 단군의 어머니가 곰신-웅신(熊神)은 우리겨레 창조의 뿌리 샘이니까. 오늘날 진해의 옛 이름이 웅신이었음은 암시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일본어로 곰은 구마(kuma)이고 가장 큰 축제 가운데 하나인 아이누의 구마 마쯔리〔熊祭〕가 이러한 곰의 신성성에 대한 가능성을 더하여 준다.
아이누 말에서 신(神)을 가무이라고 하는데 우리말에서도 신은 ‘검’(신자전)이었다. 말하자면 조물주가 ‘검’이다. 우리말에서 신을 검이라 함을 아는 이가 적다. 그렇게 배우지 않았고 가르치지도 않았으니 모를 것은 아무 이상할 게 없다. 우리 것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대한 되돌아봄이 필요하지 않은가.
감사함을 드러내는 본디 우리말이 ‘고맙다’이다. 고마에 같다는 말이 아우러짐으로써 ‘당신의 은혜가 어머니 곧 조상신과 하느님과 같다.’는 뜻이 된다. 고맙다야 말로 겨레의 화두이고 우리의 뿌리의식을 드러낸 이정표다. 민조시民調詩로 마무리를 한다.

      눈 감고 임을 보나 폭포 소리에 
      둥둥둥 북소리 
      쑥 마늘 스무 하루 꽃다운 말씀 
      더불어 살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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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이글은 한겨레신문에 연재('08-'09)되었던 원고를 다시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저자 : 정호완 hwjeong@daegu.ac.kr
약력 : 대구대 국어과 명예교수. 시조시인. 삼국유사 사업위원회 대표
저서 : 우리말의 상상력 외 36권